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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 작가

지난해까지 만 15년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냈다. 그런데도 함께 웃고 고뇌하며 서로의 시간이 뒤얽혔던 가까운 제자들 가운데 결혼을 하는 제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늦게 한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 경우는 ‘신기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너희들 나한테 결혼주례 서 달라고 할 생각 말어. 난 결혼식 주례는 절대 안 해. 아니 못해.” 그런 말을 해 온 나였기에 나만 쏙 빼고 저희들끼리 결혼을 하는 건 아닌가, 섭섭하기까지 했었다. 왜 주례를 서지 않느냐는 학생들의 말에 내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난 이 나이가 된 지금까지도 부부싸움을 하는 인간이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 주례를 서냐?”

그랬는데, 정년을 맞아 퇴임식을 끝낸 며칠 후였다. 드디어 남학생 제자가 결혼을 한다는 연락이 왔다. 119소방대원들의 고뇌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소설을 과제물로 써내서 나를 놀라게 했던 학생, 아르바이트하던 찻집의 원두커피를 싸다 주면서 “이거 점장님 허락받은 겁니다. 꼬불친 거 아닙니다” 하던 그 윤선한군이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여자친구를 인사시키러 온 자리에서였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꽁지 빠진 병아리 같이 어딘가 어정쩡하던 학생 모습은 간데없이 헌헌장부가 돼 있는 제자가 대견스럽기만 한데 옆의 여자친구 또한 청초하기 그지없었다. 청첩장도 특이했다. 겉장에는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쓰고 장소와 시간이 적힌 안쪽에는 ‘그래서 결혼합니다’라고 돼 있었다.

그 제자의 결혼식이 지난 주말에 있었다. 예식장으로 향하는 내 마음에 ‘남학생 제자의 첫 결혼’이라는 것이 작은 물결을 이루며 일렁거렸다. 젊은 시절, 나는 결혼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나쁜 사회 제도가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결혼이란 서로에 대한 속박을 전제로 하는 제도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흰 머리가 늘어난 오늘 내 생각은 달랐다.

생각해 보면 결혼이란 얼마나 신비한가. 저 우주의 어느 아득한 곳에서 어머니를 찾아와 태어나고 자란 두 사람. 멀리멀리 떨어져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 채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어른이 된 그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시작한다. 이 사람이구나 하며 제 짝임을 알고 한평생을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니, 얼마나 신비한가….

늘 서로에게 부드럽기를, 그래서 언제 어느 때나 용기와 지혜를 서로에게 바람결처럼 전해주는 부부로 살았으면 싶었다. 그래서 ‘할 수 없는 일과 해서는 안 될 것’을 깨닫고 참는 지혜를 서로에게 전해 주는 관계를 이룩했으면 싶었다. 늘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기를, 그래서 기쁨도 슬픔도 꿈도 함께하며 한평생을 살아갔으면 싶었다. 그렇게 해서 ‘진정으로 이루어야 할 일’을 둘이서 나누며 헤쳐 나가며 격려하는 사이가 되었으면 싶었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결혼을 토대로 하여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의 삶이란 본질적으로 결혼제도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는 경영이 아니던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만들 수 있는 인간관계 가운데서 결혼만큼 깊게 맺어지는 관계는 없지 않은가. 결혼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하나하나가 거룩한 창조이며 하늘 아래 새로운 시간들이 아닌가. 결혼이라는 제도로 해서 인류는 단절과 파괴를 뛰어넘어 ‘삶의 계승’이라는 엄숙함에 이르지 않는가.

서둘러 집을 나섰기에 예식장 앞에 도착하니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제자의 이름이 적힌 식장 앞에서 서성거릴 때였다. 스쳐지나가는 하객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니, 걔도 이혼한대? 그럼 그 집 딸들은 셋이 다 이혼이네!”

가슴이 먹먹해져서 결혼의 신비에 빠져들었던 내 의식의 한편이 소스라치듯 깨어나면서 갑자기 말 하나가 가슴을 가로질러 갔다. 세상을 봐라. 애 하나 낳아서 기르기도 이토록 힘든 게 이 나라 현실인데 무슨 얼어 죽을 결혼찬가냐. 우리나라 이혼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라더라. 내가 늙었구나. 드디어, 생각까지도 팍삭 늙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