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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작가

“세상이 점점 왜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와 식당에 앉아 있었다. 점심을 함께한 자리였다. 음식을 먹으며 할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 멍하니 빈 밥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작기는 참 작아졌다 싶었다. 밥그릇만 작아진 게 아니다. 거기 담기는 밥의 양도 정말 많이 적어졌다. 어린 시절, 집안의 일꾼들이 먹던 밥그릇을 생각하자면 어느새 이렇게 되었나 신기할 정도다.

방학 때면 찾아가던 할아버지 댁에는 늘 일꾼이 한 사람씩 있었다. 1년에 얼마의 새경을 받으며 일손이 모자라는 농사일을 도우면서 집안에 함께 살던 청년들이었다. 주먹을 불끈 쥔 팔에 나를 매달고 논둑을 휘적휘적 걷곤 하던 일꾼은 쌀가마를 번쩍번쩍 들어 옮기는 장사였다. 어린 내 눈에 경이의 대상이었던 그는 삶은 옥수수를 먹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턱만 아프지 배가 부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식구들이 다 호박잎에 삶은 감자를 싸 먹으며 풋옥수수로 저녁을 즐길 때도 그에게만은 따로 밥을 해 주던 고모들이 생각났다.

그 일꾼의 밥그릇은 크기도 크기려니와, 그 위에 담는 밥은 흘러내릴 듯 쌓아올린(?) 고봉밥이었다. 고모는 주걱에 물을 묻혀서 토닥토닥 두드려가면서 치쌓을 수 있는 한 높게 고봉으로 밥을 담았었다. ‘고봉’이란 그릇에 음식을 담거나 곡식을 되질할 때 그릇의 전 위로 수북하게 담는 것을 말한다. 되나 말 같이 양을 가늠하는 도량형 도구가 사라져 버린 오늘, 젊은 세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겠지만, 트럭에 과일을 싣고 나와서 주택가 골목에서 파는 과일장수들이 바구니에 수북하게 치쌓듯이 담아놓고 파는 걸 고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

한 그릇 먹고 더 먹으면 될 것을, 왜 고모는 저렇게 밥을 높이높이 담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어린 마음에 고모는 이렇게 말해 주었었다. “그럼 좋겠다만, 체면 차리느라고 두 그릇은 절대 안 먹는단다.”

높이 쌓아올린 한 그릇은 먹지만, 먹기 좋도록 설핏하게 담아서 주는 두 그릇은 먹지 않던 그것은 무엇일까. 고모에게도 일꾼에게도 고봉밥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준 예절이며 품격이 아니었나 싶다. 일꾼으로서는 두 그릇씩 ‘처먹지’ 않고 한 그릇만 ‘드신다’는 체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고모는 그에게 더 먹으라고, ‘많이 먹어야 힘을 쓰지 않느냐’고 보채거나 성화를 부리지 않았다. 한 숟가락이라도 더 밥을 올려붙이려고 물 묻은 주걱을 토닥거리며 고모가 담던 고봉밥, 거기에는 결코 밥을 더 달라고 하지 않는 그 일꾼의 체면을 아우르며 마음을 헤아리는 고모의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봉밥은 두 사람의 관계에 품격이 되었을 것이다. 밥상머리에도 염치와 겸양이 어우러져 격을 만들어내는 삶이었던 것이다.

고봉으로 밥을 담고 고봉으로 되질을 할 때 그 사회는 다만 밥그릇과 되에만 고봉이 있지 않았으리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마음씀씀이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생각함이 고봉으로 수북했을 것이다. 고봉밥도 없어지고 그릇도 작아진 오늘, 밥그릇에서만 고봉의 배려가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 ‘고봉밥’의 정신이 없다. 그저 남을 헐뜯고, 침 뱉고, 매도하고, 모함하고, 체면도 배려도 없이 치달아서 끝내는 치유될 길 없는 상처를 남긴다. 이 극단과 극한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혐오스러워서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참 살기 싫은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총선·대선을 치러내야 할 올해, 우리 사회는 또 얼마나 상스러워지고 망가져야 할 것인가. 유권자에 대한 배려를 찾을 수 없는 ‘아니면 말고’라는 혐오스러움, ‘이기면 그만’이라는 교활함이 넘치는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 묻게 된다. 고봉으로 담던 밥그릇도 삶의 질을 찾아서 작아졌는데 사회의 틀은 그와 반비례해서 그악해져만 간다. 한껏 상스러울지라도 튀면 그만이고, 뜨면 그만이고, 이기면 그만인가.

빈 밥그릇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믿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은 더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고. 묵묵히 살며 지킬 것을 지켜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