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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소설가

아이의 뇌세포가 유연할 때 영어의 바다에 풍덩 빠뜨려 놓기 위해 이 땅에 영어유치원 열풍이 몰아닥친 지는 오래다. 우리말을 주로 사용하는 일반 유치원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천문학적인 수업료에도 불구하고 영어유치원은 입학 허가를 얻기가 쉽지 않을 만큼 인기가 높은 모양이다. 고액의 수업료에다 이런저런 명목의 추가 경비도 만만찮다는데, 입학의 걸림돌은 뜻밖에도 수업료가 아니란다.

수입의 대부분을 자녀 교육비로 쓰고야 말겠다는 희생정신과 뜨거운 교육열만으로는 수준 높은 영어유치원의 학부모가 될 수 없다고 한다. 학생 선발을 위해 부모까지 영어 면접을 치러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정말 쓴웃음이 나왔다. 유명세를 탄 곳은 부모가 어학연수나 영어권 유학을 다녀온 경험이 있어야 안심을 할 수 있다니 이건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다. 만약 ‘글로벌한 마더’를 두지 못한 원죄로 자신의 유치원 입학이 거부됐다는 걸 알게 된다면, 아이의 무의식 속에 부모의 위상은 어떻게 각인될까? 어떤 영어유치원 홈페이지에는 ‘우리는 학부모 면접을 우리말로만 진행합니다’라고 적어 놓았다니 이건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붓글씨를 쓰거라, 당당히 말했던 한석봉의 어머니가 이 시대를 살았다면 슬피 울 일이다.

어찌 이 웃기는 소동이 유치원만의 책임이겠는가.

나랏말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외국어의 무분별한 사용이 도(度)를 넘고 있는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미 오래도록 사용돼온 외래어는 차치하고라도 설명을 듣기 전엔 무슨 뜻인지 모를 말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영어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지만, 우리의 삶과 사유의 근간은 엄연히 한글이다.

한글은 세계 언어학계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게 고안된 문자 체계’이며 ‘언어심리학적 현실을 풍성하게 나타내는 우아하고 경이로운 언어’ ‘기적의 문자’라는 극찬을 받는 언어다. 세종대왕은 세계 언어학 역사상 50대 주요 사상가 가운데 한 분으로 꼽힌다. 애초에 문자의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백성의 처지를 마음 아프게 여긴 세종의 철학에서 태동된 한글이야말로 미학적·수학적 일관성을 가진 진정한 명품(名品) 언어인 것이다. 이런 한글이 홀대받는 현실은 정말 부끄럽고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한편, 즉각적인 호응도 각별한 관심도 없이 우리말의 생태 환경을 정화하고 관리하기 위한 노력도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국립국어원은 2004년 이후 누리꾼들의 제안과 투표를 통해 남용되는 외래어를 다듬어왔다. 올해부터는 문인·언론인·국어학자 등으로 이루어진 말다듬기위원회를 구성해 좀 더 전문적으로 우리말 다듬기에 나섰다.

이 작업을 같이 하면서 보니, 흔히 사용되는 외국어 중에서 다듬을 말을 정하고 의견을 통합해 적절한 순화어를 선정하는 일은, 짐작보다 훨씬 힘들었다. 위원들의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참으로 깊고 뜨거워서 회의는 매번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기곤 했다. 언어란 수학처럼 똑 떨어지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다.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의미가 부합하면서도 널리 사용될 만한 단어를 발굴하고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과연 새로 다듬어 내놓는 말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질까 회의가 드는 순간도 있고 비관적인 전망을 토로할 때도 있지만 그 역시 모국어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나오는 우려들이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외국어의 물결 속에서 단어 몇 개 바꾸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비관하지 않기로 했다. 거대한 강도 한 방울의 물로 시작되는 것. 처음엔 좀 낯설어도 의식적으로 쓰다보면 우리말에 대한 애정도 새록새록 솟아날 것이다.

한글을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레시피 대신 조리법, 소셜커머스 대신 공동할인구매, 블랙컨슈머 대신 악덕소비자라고 말해보자. 발음하기 어려운 리얼 버라이어티가 아니라 생생예능이라고 불러보자. ‘말터’ 사이트를 찾아 더 많은 순화어들을 찾아 사용해보자.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