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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작가, 세종대 인문과학대 교수·국문학

이런 세상까지 보다니…. 내가 너무 오래 살았구나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요즈음 마음이 좀 불편하기는 합니다. 영화 때문입니다.

가깝게 지내는 정지영 감독과 지난 연말 저녁을 같이할 때였습니다. 소주와 맥주를 절묘한 비율로 잘 섞는 그가 불쑥 한마디 하더군요. “법정영화를 만들었는데 겨우 개봉을 하기는 하나 보다.” 그 후 영화를 본 나에게 정 감독이 보내온 문자는 대뜸 ‘재밌었니?’ 하는 절절한 것이었습니다. 없는 돈에 애썼구나 싶었고, 제목부터가 ‘부러진 화살’인데 제대로 가 꽂히려나 싶으면서도, 친구가 만든 영화에 제발 손님이 좀 들었으면 하는 기원을 담아 나도 문자를 보냈습니다. ‘관객들이 많이 웃더라. 축하한다.’

영화 제목이야 어찌됐든 ‘부러진 화살’이 흥행에는 제대로 가 꽂혔습니다.

그런데 관객의 뜨거운 박수나 즐거운 웃음소리와는 달리 부러진 화살이 꼴에 부러진 값을 톡톡히 해내면서 불러온 이상한 반향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영화를 영화로 보라’는 문화평론가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더니 법원행정처장이라는 분이 영화에 대해 ‘항소심의 특정 국면만을 부각시킴으로써 전체적으로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는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런 말도 나옵니다. ‘해당 영화는 기본적으로 흥행을 염두에 둔 예술적 허구다.’ 법원이 나서서 영화입문 교과서에도 나올까 말까 한 영화의 개념까지 규정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영화로 보라고 외치는 그분들은 ‘부러진 화살’을 보고 나서 우리가 ‘아, 그랬구나. 안성기씨가 전에 대학교수였구나. 어쩐지 뭘 해도 배운 사람 같더라니. 그랬는데 재임용에서 잘리니까 영활하게 되었군 그래. 잘 됐네 뭐. 지금 국민배우라고 사랑받는 그 사람인데 대학교수 내내 했다고 국민교수가 되었겠어?’ 하는 줄 아나 봅니다. “문성근씨가 전에 판사였는지는 첨 알았네. 그 사람도 ‘가카 어쩌구’ 하다가 짤려서 정치 시작했나 봐. 울화통 터져서라도 야당 할 만하네!” 하고 있을까 걱정인 모양입니다.

어느 포털 사이트에서든 ‘전직 교수 김명호, 그는 왜 법을 쐈나’라고 쳐 보면 압니다. 오늘도 2007년 2월14일 밤에 방영된 SBS의 뉴스추적 제413회 프로그램을 고스란히 볼 수 있습니다. 12년 동안 힘겹게 법정 싸움을 벌였던 개인 김명호 교수가 왜 석궁을 들고 판사를 찾아갔는지 그 이유를 집중 추적하고, 법원이 택한 증거가 어떻게 조작 왜곡된 가짜이자 부실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프로입니다. 영화를 가지고 ‘이는 결과적으로 사법 테러를 미화하고, 근거 없는 사법 불신을 조장하는 것이어서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고 한 법원행정처장께서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왜 말이 없으신지요.

어찌됐든, 여러분이 나서서 화제를 불러일으켜 주신 덕분에 제 친구의 영화 흥행으로 노년을 좀 덜 쪼들리며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 감사드려야 할 일이지요. 그러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한 소설가가 나서서 ‘영화를 영화로 보지 말자’고 해 버린 것입니다. 이야기인 즉 최민식이 주연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 어느 종편방송의 자본이 참여했으니 보지 말자는 거더군요. 영화를 보려면 이젠 자본을 보고 골라야 할 판입니다.

전체주의란 개인의 모든 것을 전체에 종속시키는 사상이나 정치체제의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영화를 놓고 우려한다는 으름장, 보지 맙시다 하는 회유, 영화는 영화로 보시오 하는 경멸에 가까운 발언과 행위들이 개인의 사생활까지를 적극적이고 강제적으로 전체에 종속시키는 지극히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라는 게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어쩌면 스스로 가장 개인주의적이고 민주적이어야 할 ‘즐거운 영화보기’에 이 무슨 교화이며 계도인지요. 그래서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도권력이나 문화권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보기의 즐거움에까지 제발 권력의 이름으로 우리들을 손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재미없으면 아무리 1000만 관객의 강제규 감독이 만들어도 깨지는 게 영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