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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작가, 세종대 인문과학대 교수·국문학

연극무대가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지면서 객석은 어둠에 잠겼다. 지난해 말 대학로에서였다. 작품은 ‘노부인의 방문’, ‘극단 김금지’의 10회 공연으로, 연극배우 김금지씨의 연기생활 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었다.

무대는 한 여인이 40년 만에 고향을 찾는 데서 시작되었다. 소극장이라는 공간의 어수선함을 압도하며 이야기의 서사성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무대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나는 어쩐지 연극에 몰입되지가 않았다. 어느새 김금지씨가 무대에 선 지 50년이나 되었다는 말인가. 그녀가 무대에 나타날 때도 사라질 때도 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 배우에게 50년이 흘러갔는가’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젊은 시절 어느 여성지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책상머리에 붙여놓았던 것이 그녀와의 만남이었다. 그때 함께 붙어 있던 사진이 그리스의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가 영화 ‘페드라’에서 머리카락을 날리며 바닷가에 서 있는 장면이었다. 뒤늦게 명동의 국립극장에서 그녀를 처음으로 바라본 것이 1969년이었다. 한 배우의 익어가는 삶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살아오면서 가질 수 있었던 행운의 하나였다.

그녀의 무대인생 50년을 더듬어 보며 설레는 사이 어느새 연극이 끝났다. 어쩐 일인지, 무대로 걸어 나와 인사를 하는 그녀는 다른 때와 달리 웃고 있지 않았다. 형형한 눈빛으로 무대 위 어둠 속을 바라보는… 어딘가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우리의 관극 체험에는 아직도 기립박수라는 헌사가 낯설어서였을까. 가득 메운 객석에서 박수가 이어졌지만, 그러나 아무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50년, 반세기다. 시간의 단위 안에서 한 세기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100년이라는 한 세기를 우리가 가장 의미 있는 변화의 축으로 생각하는 것은 100년을 넘기지 못하는 인간의 생명 때문인지도 모른다.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어린 소녀가 처음 연극과 만난 것이 광주여고 2학년 때였다. 국립극단 연기 연수생 1기로 무대에 선 첫 작품이 1965년 국립극장 현상 공모에 당선된 평양 출신 극작가 이재현씨의 ‘바꼬지’로 이진순씨 연출이었다. 그렇게 이어진 무대가 50년이다. 백성희로부터 여운계, 박정자, 손숙…. 이제는 추억으로나 간직해야 하는가 하는 아쉬움 속에 떠오르는 이름들과 함께 한국연극의 찬바람과 새벽 이슬을 함께 하며 그녀는 우리 곁을 지켜주었다. 제자들이 무대에 설 기회를 만들어 주자는 생각에서 자신의 이름을 붙인 ‘극단 김금지’를 창단한 것이 2001년이니 ‘책임 있게 연극을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이 일도 어느새 10년을 넘긴다.

조각에서 사진까지를 넘나들었던 아트디렉터 알렉산더 리버먼은 ‘모든 예술은 외로움이며 작업장은 고통의 장소’라고 술회한 바 있다. 그가 만든 붉은 색의 거대한 야외조각을 보고 있자면 즐거움만으로 흥얼거리면서 작품을 했을 것만 같았던 리버먼까지도 고독과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50년의 세월 동안 배우 김금지가 겪고 넘어야 했던 고독과 고통은 어떠했을 것인가.

국격(國格)이라는 말로 국가의 품격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어찌 나라의 품격만이겠는가. 어떤 미디어도 ‘배우 김금지의 연기생활 50년’이라는 이 기념비적인 발자취를 조명하지 않고 지나치는 현실을 보며 문화에까지 격이 없어지는가 싶어 서글프다. 2006년 의붓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페드라’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설 때는 ‘페드라 연기를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출연하면서 ‘최소한 얼굴살 정도는 빼고 무대에 오르는 게 관객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에서 몸무게를 무려 10㎏이나 감량했던 그녀다. 가치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회, 그런 것이 사라지는 사회를 살아가도 좋은 것인가 묻고 싶어진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기립박수를 보내며 껴안고, 꽃다발을 안기며 머리 숙여 감사했어야 했던 시간만이 아니다. 한 배우의 삶이 녹아내린 50년 세월의 무대를 좀 더 뜨겁게 기억해야 하지 않았을까.

‘감사합니다. 연극배우 김금지씨. 우리는 또 이어질 당신의 다음 무대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