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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작가, 세종대 인문과학대 교수·국문학

언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던가 싶다. 소설가가 되어 내년으로 40년을 맞는다. 이 40년 가운데 지난 15년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그리고 이제 정년이 되어 마지막 학기를 마무리하고 학교를 떠나야 한다.

어린이대공원과 정문을 마주한 대학이라 9층에 자리한 연구실 창 밖으로는 대공원의 숲이 바로 내려다보인다. 거기 자지러지게 꽃이 피고, 거대한 음모처럼 녹음이 출렁거리고, 찬란하게 물들었던 나뭇잎이 비바람에 떨어져 가고, 흰 눈에 덮이며 겨울을 건너는 숲을 바라본 세월이었다. 그랬기에 계절마다 “선생님, 벚꽃놀이 가요” “선생님 단풍 속에서 야외강의 해요”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었다.

학기가 시작되면 첫 강의 시간에 빼놓지 않고 한 말이 있다. “우리 모두 빛나는 열쇠가 되자”는 당부다. 안 쓰는 열쇠는 녹이 슬고 색깔이 변하지만 쓰고 있는 열쇠는 항상 빛난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빛나는 열쇠가 되자. 너희들은 나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빛나는 열쇠가 되어, 강의가 있는 날이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만나는 한 학기를 만들어 가자.

숲의 색깔이 변하며 한 학기가 끝나는 마지막 강의시간에는 잊지 않고 한 이야기가 있었다. ‘물이 되어 가거라’하는 부탁이었다. 물을 보아라. 물은 높은 곳을 만나면 천천히 돌아서 간다. 깊은 웅덩이를 만나면 흘러넘칠 때를 기다린다. 그러나 물은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에 가 닿는다.

앞으로 살아갈 너희들의 삶에서 슬픔과 절망의 산을 만나거든 천천히 물처럼 돌아서 가거라. 좌절과 고뇌의 깊은 수렁에 빠지거든 물처럼 고이면서 흘러넘칠 때를 기다려라. 그러나 물이 흐르는 것을 멈추지 않듯이 먼 길을 돌고 기다리면서 너희들의 꿈을 향해 걷고 걸어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물이 바다에 가 닿듯이 젊은 날 뜨겁게 간직했던 꿈을 이루어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

국문과의 창작전공 교수이면서도 나는 늘 문학과는 아주 다른 분야의 교양강좌를 하나씩 해 왔다. 내가 아는 수많은 ‘인간’을 학생들에게 전해 주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거기서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도, 쿠바의 혁명아 체 게바라도, 미국의 사진가 도로시아 랭도 다루었다. 그때마다 나는 강의의 어젠다를 ‘앎과 됨’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안다’는 것은 지식이며 정보다. 그러나 나는 이 강의에서 학생들이 그들을 알기보다는 그들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도로시아 랭을 안다는 것은 그녀의 사진 ‘이주 노동자의 어머니’가 왜 걸작인지를 알고, 일련의 사진들로 국가의 정책을 이끌어내는 공헌을 했음을 아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사진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소아마비로 절름거리는 다리를 하고 1930년대의 미국 대공황과 이주노동자의 삶을 증언한 열정을 네 가슴에 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희망이 있는 한 절망은 한순간이다’라는 그녀의 신념을 자신의 가슴에 새기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알지 말고, 아는 사람이 되어 다오.

오늘, 잎 떨어진 나무들로 가득한 대공원의 숲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또 한 해를 넘기며 저기 눈이 내리고 쌓이고 하리라.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강의에서 무슨 말을 남겨야 할지, 묵묵히 겨울을 나고 있는 숲을 바라본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후 400년 동안 ‘심수관’이라는 조선 이름을 잃지 않고 일본에서 도예가로 살아낸 가문의 14대 심수관이 내게 했던 말을 전해 줘야겠구나. 그는 가업을 잇지 않고 다른 길을 가려는 아들을 앉혀 놓고 말했다고 한다.

‘풀을 보아라. 풀씨는 어디에 떨어지든 그곳을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거기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한다. 풀의 운명, 그것이 이국에서 도공의 가계를 이어가야 하는 너의 길이다.’

어느 시대에나 젊은이는 자신의 시대를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군사독재 시대를 살던 젊은 날 나도 나의 시대를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었다고.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