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이 서울시내 한 공사현장의 비계 위에서 건물 외벽 작업을 하고 있다. 임정현기자 theos@munhwa.com

18일 오전 5시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한 인력사무소 앞.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두꺼운 외투를 입은 40~60대의 남성들이 하나둘 사무소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결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은 일명 ‘막노동꾼’이라 불리는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굳이 묻지 않더라도 햇볕에 검게 그을린 피부와 모진 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손이 그들이 누구인지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루 7만~8만원의 돈을 손에 쥐기 위해 많은 노동자들이 이른 새벽부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에서 만난 이재호(66)씨는 막노동 근로자라 하기에는 다소 왜소한 체격이었다. 키는 170㎝ 정도였으나 몸보다 커 보이는 검은색 패딩 점퍼가 그를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깡마른 얼굴에 모자까지 깊게 눌러쓰고 있어 그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 보였다.

이씨는 1990년 중반까지 꽤 잘나가던 가구 사업가였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인해 사업이 급속도로 기울었고 결국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가 가정을 일으키려 했지만 현지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향수병을 앓게 됐다. 이를 이겨 내려 술을 입에 대면서 가정을 소홀히 해 결국 이혼을 한 뒤 홀로 한국에 돌아오게 됐다. 아직도 아들과 딸은 미국에 있지만 연락을 해본 지 오래다.

이씨는 건설현장에서 주로 페인트칠을 한다. 건설 경기가 좋을 때는 어느 정도 먹고살만 했지만 3~4년 전부터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벌이가 시원찮은 상태다. 이번 여름에는 비가 많이 내려 일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특히 어려웠다. 예전에는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최근에는 일주일에 2~3일 정도밖에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쏟아지는 외국인 노동자와의 경쟁도 힘에 부친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대부분의 업체에서는 삯이 저렴한 중국이나 동남아의 외국인 노동자를 쓰려 한다.

이 때문에 한 달 수입은 70만~80만원 정도가 고작이다. 방세를 내고 밥값, 담뱃값을 빼고 나면 실질적으로 저축할 돈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하루살이 인생이야. 나이 먹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을 어디서 불러주겠어. 그냥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다 가는 거겠지.” 이씨의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배어났다. 인력사무소의 한 직원은 “막노동꾼들은 수입이 적고 일정치 못하니 기반을 다질 목돈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며 이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표현했다.

같은 시각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1가 영등포역 일대에도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장년층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크고 작은 인력사무소만 십여 군데 모여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인력시장이다. 2층에 위치한 한 인력사무소를 올라가 보니 60석 내외의 대기실은 이미 만석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이 모두 일거리를 얻는 것은 아니었다.

한 인력사무소 소장인 엄찬섭(72)씨는 “오늘 열댓명 나왔는데 일이 없어서 겨우 세명 정도만 일을 나갔다”며 “요즘은 경기도 안 좋아 일거리가 없어 다들 일주일에 1~2번밖에 일을 못 나간다”고 말했다. 실제로 오전 7시30분까지 사무소 안에서 묵묵히 연락을 기다리던 노동자 네명은 결국 일거리를 받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오늘 허탕을 친 이모(50)씨는 “하루 벌어 봤자 밥값하고 약값 빼면 5만원밖에 안 남는데 오늘은 이마저도 없다”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왼쪽 중지는 얼마 전 현장에서 당한 부상으로 부어 있는 상태였다. 채 발목을 덮지 못한 바지와 양말 사이로도 찢기고 긁힌 상처들이 덩그러니 드러났다.

이씨는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아 재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보건소만 해도 평일은 일찍 닫고 주말은 열지 않으니 노동자들을 위한 의료시설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오전 8시 일거리를 얻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는 이씨 사이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무심히 지나가고 있었다.

유민환·박정경기자 yoogiz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