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읽기를 권함 / 김무곤 지음 / 더숲

일제강점기에 최고의 산문가로 꼽혔던 이태준은 수필집 ‘무서록’에 이렇게 썼다. ‘책에만은 나는 봉건적인 여성관이다. 너무 건강해선 무거워 안 된다. 가볍고 얄팍하고 뚜껑도 예전 능화지처럼 부드러워 한손에 말아쥐고 누워서도 읽기 좋기를 탐낸다.’

이태준의 글을 좋아하는 저자가 펴낸 이 책은 무겁지 않다. 그동안 북리뷰 프런트 페이지 톱 기사로 소개했던 책들에 비해 부피가 작은 편이다. 장정본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정보기술(IT) 혁명의 아이콘인 스티브 잡스가 국경을 넘어 추앙받는 이 21세기에 도대체 종이책 따위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이유를 이토록 명쾌한 논리와 풍성한 사례로 소개해놓은 책은 드물 것이다.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학에서 언론학을 가르치는 교수인 저자는 젊은 제자들과 함께 호흡하느라 첨단 정보기술과 매체 활용에 힘쓴다. 그는 책 따위는 읽지 않아도 사람들과의 소통에 아무런 지장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한국사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텔레비전의 오락프로그램에 등장했던 연예인의 신변잡기를 알지 못한다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힘들지만, 책에서 읽은 지식은 소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강의실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노라면 종이책이 미구에 사라질 것이라는 미래학자들의 예언이 실감난다. 그럼에도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책을 읽는 일은 축구를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기쁨과 가치를 인간에 선물한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일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앞으로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아니, 꼭 이어져 나가야만 하는 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책을 잘 읽지 않는 이유는 성공하거나 돈 버는 것과 관계가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찰되고 정제되고 검증받는 지식은 무시되고 설익은 사상, 자극적인 발언, 돌출적인 생각들만 주목받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이는 사회 변동기의 짧은 한 시기에 일어나는 이례적 현상이란 게 저자의 시각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우리 사회도 책을 통해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한 리더(reader)가 리더(leader)가 되는 공동체로 진화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종이책의 장점을 설명하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우선 인간의 다양한 감각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 손으로 책을 넘길 때 촉각의 쾌감을 느낄 수 있고, 책장이 넘어갈 때 청각이 동원되며, 종이 냄새에 후각이 흔들린다. 종이책은 휴대전화처럼 충전하지 않아도 ‘무한 에너지’의 배터리를 품고 있는 매체다. 책과 단독자로 대면하는 개인매체이면서도 여럿이 돌려가며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올드미디어로 여겨지는 종이책이 사실은 21세기를 지배하는 뉴미디어의 특성을 이미 다 갖고 있다고 말한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흉내내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책 읽기의 고통이 가장 큰 장점?= 저자에 따르면, 종이책 읽기의 가장 큰 장점은 읽는 이의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는 행위보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훨씬 힘든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통제하는 고통을 이겨내는 일이다. 그 때문에 그 힘겨운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책을 온전하게 다 읽은 사람은 그 책의 주인이 된다. “하품과 잠과 고통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의지대로 책을 읽을 때, 책 읽는 사람은 하나의 작은 우주가 된다.”

저자는 책을 많이 읽는다고 인격자가 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자부심 탓에 오히려 유아독존 형의 인물이 된 자들이 드물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책읽기를 권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에 쉽게 공감을 하는 것은, 이 책의 구석구석에 담긴 이야기들이 사뭇 흥미로운 까닭이다.

예컨대 지금은 책을 혼자 조용히 읽는 게 대세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시대까지는 책은 소리내어 읽어야 하는 물건이었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서구에서 10세기까지 묵독은 수상한 일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모친의 편지를 소리내어 읽지 않아서 부하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조까지 책을 소리내어 읽었기 때문에 정인지, 조광조 등의 목소리에 반한 처녀들이 담을 넘어와 사랑을 고백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 묵독이 일반화하면서 책에 담긴 내용이 보다 은밀해지고 풍부해졌다고 한다. 에로틱한 주제나 묘사가 대담해졌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이 책을 무척 공들여 썼다며 독자가 이 책을 천천히 읽어주도록 당부했다. 본문의 내용을 설명하는 주석을 읽다 보면 공들였다는 이야기를 절감하게 된다. 고서점을 왜 헌책방이라고 부르면 왜 안 되는지, 문학평론가 김현의 직업이 교수가 아니라 ‘독서인’인 이유 등을 알 수 있다. 여느 책들이 주석을 본문의 아래나 뒤에 오게 처리하는 것과 달리 이 책은 글의 오른쪽 페이지에 배치했다. 편집자들이 무척 애썼을 것이란 짐작이 간다. 공들인 책을 한달음에 읽어버린 것이 못내 미안할 따름이다. 다만 저자의 독법, 즉 ‘읽은 책을 다시 읽기’를 흉내내면 될 것이라고 자위한다.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