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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작가, 세종대 인문과학대 교수·국문학

고모님 한 분이 또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를 유난히 살갑게 대해 주던 고모였기에 마음에 오는 울림이 한결 더 애잔할 수밖에 없었다. 방학 때 할아버지 댁을 다녀올 때면 차멀미를 심하게 하는 나를 위해 빈 사이다병에 꿀물을 타서 건네주곤 하던 고모였다.

‘뭔 남자애가, 나도 안 하는 멀미를 다 하니.’

남아선호에 남성 우월주의에 빠져 있던 시대를 살았으니 그랬으리라. 그 고모가 나에게 하는 말에 늘 따라붙던 것이 ‘뭔 남자애가’라는 말이었다. 뭔 남자애가, 그렇게 웃니. 뭔 남자애가, 지렁이를 다 무서워하니. 남자는 오호호가 아니라 우하하 하며 웃어야 하고, 남자는 지렁이 따위는 한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 고모가 세상에 태어나던 시절은 어쩌면 딸은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할아버지는 딸들의 이름을 그렇게, 말 그대로 아무렇게나 지을 수 있었으랴. 갑자년에 낳으면 갑생이었고 을축년에 낳으면 을생이었다. 기미년에 태어난 고모가 없어서 다행이네요 하고 내가 웃은 건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그러고 보면 한 세대 만에 이룩한 한국 여성의 여권처럼 놀라운 변화도 없다. 대가족의 붕괴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오는 과정과 무관치 않다고 하더라도 핵가족화와 산아제한은 한 세대의 한국 여성이 단칼에 이룩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강의실을 오가며 늘 느끼는 것이지만 요즘 여학생들은 남학생보다 목소리가 훨씬 더 크다. 남학생이 에티켓이 있고 여학생이 교양이 없어서가 아니다. 여성이 그래도 되는 사회를 우리 여성들이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여권을 가늠하는 잣대는 얼마나 성이 개방돼 있느냐와 사회적 활동을 포함하는 시민권에 있다고 우먼파워를 이야기한 여성학자는 마거릿 미드 여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는 우리 여성사에 의미가 깊다. 여성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가 살 집을 자기가 고르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부터였기 때문이다. 한 앙케트 조사 결과는 그때 이미 70%의 여성이 이사를 할 때 자기가 살 집을 자기가 고른다고 대답하고 있다.

문제는 이 여성파워가 가정교육을 넘어서서 사회 전반의 교육 문제까지를 점령해 버린 지가 오래라는 데 있다. 뭐가 문젠데? 하고 눈을 부릅뜰 여성 독자가 저기 보이는 것 같지만 그래도 한마디 하자면, 우리들의 가정교육이 서 있던 근간은 엄부자모(嚴父慈母)였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엄한 규율로 자녀들의 교양과 사회적 처신에 대해 가르쳤다면 어머니는 인자한 손길로 사랑과 생명의 존엄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이 무너져 버렸다. 요즈음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맞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맞으면서 큰다. 어머니에게 맞으면서 큰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여자가 무섭지 않을 수가 없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졸아드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며, 나는 혼자 웃곤 한다.

지난 학기, 창조적인 글쓰기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과제물로 ‘도마’라는 제목을 내놓았을 때였다. 글 가운데는, 엄마의 도마 소리만 들어도 지금 무슨 반찬을 하시는구나 알 수 있답니다 하는 사모곡도 있었다. 한가운데가 움푹 파인 엄마의 도마는 어머니의 땀이 파내려간 깊이이며 우리 형제를 위한 사랑의 바로미터라고 식당 일을 하는 홀어머니를 이야기한 가슴 눅눅해지는 글도 있었다. 그러나 여러 학생의 글 가운데 한 남학생이 쓴 글은 제목부터가 압권이었다. ‘도마로 맞아 본 적 있으신가요?’

뭘 잘못했기에 이 녀석은 엄마한테 도마로 맞은 것일까. 엄마가 행주를 들었거나 세금 고지서 같은 걸 들었을 때 잘못을 고백해야지 어쩌자고 도마를 든 엄마한테 고백을 하냐.

도마로 아드님의 머리통을 내리쳐서라도 사람을 만들겠다는 어머니의 열정은 높이 사지만, 글씨 제대로 쓰고 젓가락 제대로 잡는 법부터 가르치는 가정교육만은 우리 어머니들이, 우리 여성들이 일으켜 세워 주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