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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소설가

남쪽 바닷가에 자리 잡은 경남 진해는 군항도시다.

유년 시절 잠시 살았던 곳이라 내게는 군항이라는 딱딱한 이미지보다는 겨울의 끝이면 천지를 뒤덮던 벚꽃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진해의 바다는 여름이면 언제라도 물에 뛰어들 수 있는 자연 풀장이었다. 깨끗하기도 했거니와 파도가 높이 일거나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군항이 자리잡기엔 최적의 장소인 것이다.

며칠 전 해군사관학교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태풍 ‘무이파’가 지나는 중이었다. 가끔 흐렸으나 진해의 바다는 여전히 호수처럼 잔잔했다. 해안에는 하계 극기훈련이 한창이었다. 얼굴이 초콜릿 빛깔로 그을린 생도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생존훈련을 하거나 까마득히 보이는 섬까지 헤엄쳐 다녀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태양과 겨루는 젊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물과 사투를 벌이는 그들은 심장이 터질 듯하겠지만 그 역동하는 에너지는 바라보는 사람마저 충전해주는 것이었다.

이 고된 훈련을 겪어내야 하는데 여생도도 있을까? 당연히 있었다. ‘차이는 있으나 차별은 없다’는 원칙 아래 모든 훈련을 수행한다는 여생도들은 해맑은 ‘생얼’이었다. 립글로스조차 바르지 않은 얼굴이 빛나도록 예뻤다. 또래 친구들이 한창 외모를 가꾸고 패션에 관심을 가질 때 그들은 극기훈련으로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고된 훈련으로 입술이 온통 부르튼 모습에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해안으로 나가서 배를 둘러보았다. 거북선과 잠수함과 이지스구축함. 이 셋을 동시에 본다는 것은 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일이다.

실물보다 살짝 큰 사이즈로 재현했다는 거북선. 이 자그마한 목선을 슬픔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거북선은 직접 적과 부딪쳐본 이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전함이었다. 날아오는 포와 화살을 피하면서 동시에 공격을 해야 하고, 적의 배와 부딪쳐 침몰시켜야 했다. 온 몸이 무기인 것이다. 그 배에 있는 뒷간을 나는 한참 바라보았다. 죽거나 죽이면서도 먹어야 했고 배설해야 했다. 배 구석구석에는 열두 척의 배에 나라의 명운을 걸었던 이순신 장군의 고뇌와 지략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지스는 육·해·공에 대한 방어와 공격이 가능한 첨단 구축함이다. 세종 이지스함은 움직이는 사령부라 할 만했다. 엄청난 스케일과 미사일을 요격하는 정교한 첨단기술이 공존하는 전함이었다. 마치 SF영화의 장면 속으로 들어간 듯했다.

해안엔 거대한 고래같은 검은 물체가 떠 있었다.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자인 손원일 제독의 이름을 딴 잠수함이었다. 들어갈 땐 호기심이 컸다. 여성이 들어갈 수 없는 유일한 곳이라니. 매끈한 외양과 달리 내부는 무수한 선들의 집합체였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함장님은 국가기밀이라며 알려주지 않았다. 잠수함을 들어가고 나올 때는 함상에 게양된 국기에 경례를 해야 한다. 들어갈 땐 무심했으나, 가파른 수직계단을 올라와 휘날리는 태극기에 경례를 하는 마음은 좀 달랐다. 함장과 취사병의 침대 크기가 똑같았고 동일한 테이블에서 작전회의와 식사가 이뤄졌다. 손으로 노를 저어야 했던 거북선과는 너무도 달랐지만, 제한된 공간 속에서 목숨 걸고 삶과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았다. 거북선과 마찬가지로, 잠수함과 이지스함도 우리 기술로 생산된 배다. 자긍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즈음 제주의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갈등의 골이 깊다. 양측의 주장은 각각 옳다. 제주는 평화의 섬이며, 인류의 유산으로 보호돼야 할 아름다운 환경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거북선이 필요 없는 세상, 잠수함 같은 걸 만들 필요가 없는 세계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세상이 평화에의 열망만으로 지탱되고 미소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해 양보해야 할 때가 있다. 군항 진해가 여느 바닷가보다 더 깨끗한 것처럼, 강정 역시 그 아름답고 청결한 모습을 유지한 채로 국가안보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