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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호/前 안기부 차장, 울산대 초빙교수

북한이 남북 비밀협상 내용을 까발리면서 이명박 정부를 모욕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돈을 주면서 정상회담을 하자고 애걸했다는 것이 폭로 내용이다. 이런 판국인데도 최근 다시 정상회담을 포함한 남북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아무리 버텨도 남북대화에 목을 매는 것은 결국 한국이 될 것이라는 북한의 속셈이 적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남북대화가 그렇게 절실한 것인가? 이를 위해 국가적 존엄마저 포기하고 북한의 굴욕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대화는 좋다. 또 필요하다. 그러나 남북대화가 반드시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는 비법은 아니다. 지난 60여년의 남북관계를 보더라도 이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대화가 좋다는 명분론에만 집착, 모양만 갖추는 데 급급해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북한은 항상 대한민국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한번도 한국을 공존공영의 대상으로 여긴 적이 없다. 남북대화는 그래서 적의를 잔뜩 품은 북한과의 대화라는 구조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 아직도 ‘남조선혁명론’이라는 시대착오적 이념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7월1일 중국 공산당은 창당 9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중국은 이제 계급투쟁론, 프롤레타리아 혁명론과 같은 공산주의 핵심 이론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는다. 오직 중국 전체 인민의 삶과 복리 증진에만 전념하는 보통국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북한의 역사적 행보는 중국과 딴판이었다. 그 결과 중국이 이미 폐기한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을 아직도 껴안고 있는 기상천외의 공산 독재체제가 됐다.

문제는 그들이 추구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의 중심에 남조선혁명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조선에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기필코 달성하겠다는 것이 북한 혁명의 최종 목표다. 북한은 불과 8개월 전인 지난해 9월28일 개최된 당대표자회의에서도 이를 재확인했다. 노동당 규약을 개정하면서 남조선 적화가 북한 혁명의 최종 목표임을 다시 공언했던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다. 그러나 남조선혁명론은 북한이 그냥 한번 해보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지난 60년 간 북한의 대내외 정책을 지배한 핵심 코드였다. 주민을 굶기면서 군사력을 건설한 것도, 핵무기를 개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혁명은 대를 이어 완수해야 한다며 3대에 걸친 권력세습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남조선혁명론은 김정일 체제를 지탱하는 중심 논리로 굳어졌다. 대내외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이제 와서 이를 포기할 수도 없게 됐다. 바로 이것이 한반도 위기의 실체이고 우리가 직면한 불편한 진실이다. 이런 현실의 냉철한 성찰없이 근거없는 희망만 가지고 남북대화를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을 자초할 수 있다. 햇볕정책이 준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됐음을 국민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미국의 안보가 위협 받는 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미국인 살해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에 담겨 있는 강한 결의가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북한이 대한민국 체제를 넘보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해선 안된다.

지난해 북한의 천안함·연평도 도발을 그렇게 쉽게 잊어서는 안된다. 용사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추궁해야 한다. 이 엄중한 국가적 책무 이행에 정파적 이해나 계산이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국가 안위는 근거없는 희망 사항으로 결코 지켜지지 않는다. 냉철한 현실 인식에 기초한 철저한 대비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이를 유념하고 국가 안보에 대한 결의를 다지는 것, 이것이 최근 잦아지고 있는 북한의 군사 보복 위협에 대한 우리의 답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