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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 소설가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 내가 이 멋진 말을 처음 본 것은 이병주 선생의 소설 ‘산하’에서였다. 30년쯤 전의 일이다. 그때 어느 시사월간지에 이병주 선생이 대하소설 ‘산하’를 연재하며 그 작품의 서문으로 딱 한 줄 이렇게 썼던 것이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그때 나는 어린 소설가 지망생으로 매달 그 월간지가 나올 때를 기다려 강원도 소도시의 서점에서 서서 ‘산하’를 읽었다. 그리고 이 다음 내가 정말로 소설가가 된다면 나도 내 소설 앞에 저렇게 멋진 서문을 붙이리라 생각했다. 내 나이 스물두세 살 언저리의 일이었다.

그리고 까마득히 그 일을 잊었다. 내가 소설가가 된 것은 그로부터 7~8년 후의 일이었고, 나는 젊은 작가로 1980년대 우리 현실의 숨 막히는 역사와 당면하여 그것을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것처럼 그려내는 일에조차 힘겨워했다.

내가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이 말을 다시 책에서 마주한 것은 최근 홍인희씨가 펴낸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라는 책에서였다. ‘정철도 몰랐던 21세기 관동별곡’이라는 부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시대의 한 지식인이 오래도록 강원도에 근무하는 동안 새롭게 알게 되고 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이 산하의 역사와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인문학적으로 써내려간 책이다.

처음 원고를 접했을 때는 그보다 좀 더 체계적이고 지방의 역사와 전설들을 모아 엮은 책이겠거니 했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한장 두장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그렇게 책장을 넘기는 내 자세를 보니,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한 곳은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자세였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책상 앞으로 이동해 마치 공부를 하듯 반듯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 산하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안의 내용을 한편 두편 읽다보면 이것은 강원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사람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숨결 이야기였다. 단순히 거기에 나도 모르는 강원도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차원을 넘어 그곳에 있는 돌 하나, 나무 하나, 무너진 집터 하나가 거기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마치 옆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하듯 들려주는 우리 산하의 이야기인 것이다.

사실 나야말로 내 고향이기도 한 강원도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썼던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기도 하고 군대생활도 강원도 전방에서 해서 그 산하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해왔던 터였다. 소설의 내용도, 무대도 강원도 이야기가 많았다. ‘은비령’ 같은 내 소설 제목과 똑같은 지명이 새로 생겨나기도 하고 그곳에 ‘은비령 타운’과도 같은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다.

그래서 누가 소설로든, 어떤 이야기로든 새롭게 강원도의 이야기를 쓴다고 했을 때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연 그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산하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깊이 있게 관찰하고 담을까, 마치 어떤 심사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아주 제대로 된 우리 산하의 입문학서 한 권을 만난 것이었다.

420년 전 송강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강원도 동쪽 지역을 두루 둘러본 다음 ‘관동별곡’을 남겼다. 햇빛에 바래고 달빛에 물든 관동의 이야기가 그가 머문 마을마다 또 그가 의미를 둔 명소마다 이 땅의 문화유산처럼 우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

그리고 420년의 시간이 지난 다음 또 한 사람의 강원도 지방 부임자가 자신의 발끝으로 신관동별곡을 써내려간 것이다. 어떤 공간의 역사와 문화를 아무르는 것이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자연의 생태와 그곳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숨결까지 섞어 삶의 비의를 찾는 작업은 정말 거기에 십수년 이상 심취하지 않고는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그런 노력으로 또 한 권의 관동별곡을 갖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