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구자흥 명동예술극장장은 “공연문화 기획자로서, 세시봉 시절 통기타 가수와 관객들이 명동에서 한데 어우러져 상업성을 배제한 채 낭만의 향취를 만끽할 콘서트 개최 구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연수기자

“1960~1970년대 음악감상실 ‘세시봉(C’est ci bon)’ 시절 대학생들은 요즘에 비해 촌스러웠으나 낭만이 있었고, 개인보다 사회를 생각하는 그 무엇이 있었지요. 젊음을 발산하면서도 폭넓은 시야로 사회를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패션1번지’로 변모했지만 과거 ‘문화 1번지’로 통하던 서울 중구 명동길, 이제는‘대한민국 공연예술 1번지’ 부활을 꿈꾸는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구자흥(66) 극장장 겸 (재)국립극단 이사장을 만났다. 구 극장장은 “세시봉 시절 가수들과 관객들이 명동예술극장에서 함께 모여 낭만콘서트를 열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표시했다.

“당시 젊은 문화의 산실이었던 음악감상실들은 자기표현이 자유로웠고, 편안함과 즐거움이 있었으며, 만나는 사람들은 나름의 끼와 개성이 있었지요.” 뿔테안경 쓴 학구파의 풋풋함이 느껴지던 연극인은 이제 머리가 벗겨진 노신사로 변모해 있었다. 하지만 세시봉 DJ 시절 저음의 구수한 음색과 공연예술에 대한 불타는 열정, 예술혼만큼은 젊은시절 못지않았다.

구 극장장은 인터뷰 내내 “연극인과 가수들은 많이 알지만 음악은 잘 모른다”며 “세시봉과 ‘르 시랑스(Le Silence)’ DJ는 아르바이트를 위한 외도였을 따름”이라며 본업은 연극인임을 강조했다.

“제가 음악은 잘 알지 못했지만 영어 발음과 목소리가 좋아서 세시봉 DJ의 복을 누렸지요. 세시봉 이전에 종로의 음악다방 ‘뉴월드’에서 일했는데, 현재 저작권위원회 위원장인 MC 이상벽씨에게 사회 자리를 물려주기 전까지 사회와 DJ를 동시에 했지요.”

구 극장장은 “강근식씨가 이끄는 홍익대 밴드 멤버들이 출연할 때 홍익대 재학생이던 이상벽씨가 사회를 맡았는데 특유의 입담과 유머감각으로 청중을 단번에 휘어잡아 그 때부터 세시봉의 MC 바통을 넘겨주었다”고 회상했다.

“세시봉은 아카데믹한 서울대 문리대 분위기와는 다른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제가 대학시절 연극에 몸담으면서도 배우를 못하고 스태프가 된 것처럼, DJ로서도 수수하게 진행했을 뿐 ‘전문 MC’인 이상벽씨처럼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했다”고 겸손해했다. 당시 이상벽씨는 홍익대 밴드가 보사노바 재즈 ‘카니발의 아침(Manha de Carnival)’을 경음악으로 연주할 때 가끔씩 학군장교(ROTC) 복장을 한 채 사회를 맡아 청중을 매료시키기도 했다.

세시봉은 포크송 1세대 거의 대부분이 거쳐간 통기타 음악의 산실이었다. 구 극장장이 당시 서울대 문리대 동창이던 김종철 전 연합뉴스사장, 방송국 PD 출신인 ‘통기타 음악의 담임선생’ 똘강 이백천 선생과 함께 매주 금요일 밤 이벤트인 ‘대학생의 밤’을 연출해 큰 호응을 받았다. 조영남, 이장희, 박상규, 장우 등 통기타 주역들과 각 대학 연주팀들이 출연했고, 방송국 프로듀서와 가요계 종사자 등이 참석했다. 세시봉을 낭만적 통기타 문화의 산실로 키우는 데 구 극장장도 DJ로 한몫했다. 세시봉 DJ 경험은 문화예술 기획자로 커가는 데 자양분이 됐다.

“조영남씨는 통기타 음악, 연극, 오페라 등 못하는 게 없는 탁월한 재능으로 벌써부터 두각을 나타냈지요. 서울대 개교 20주년 기념 연극 ‘산돼지’를 비롯, 푸치니 오페라 자니스키키에서 주역을 맡았고, 세시봉에서는 통기타의 탁월한 가창력으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뉴월드’ DJ로 있던 구 극장장은 모집광고를 보고 찾아가 수입이 쏠쏠한 세시봉 DJ 자리를 꿰찬다. “당시 입주 가정교사 월수입이 1500원, 출퇴근 가정교사는 3500원 하던 시절 세시봉 DJ는 6000원이었어요.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7500원 하던 때라 그만한 아르바이트는 찾기 힘들었습니다.”

세시봉 DJ는 신곡이 나오면 레코드를 들려주고 별점을 매겨 인기도를 측정하는 ‘성점(星點)감상실’을 운영했다. 당시 음악감상실 세시봉은 TV, 라디오의 매스(mass) 미디어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 통기타 가수들을 길러내고, 청년문화를 살찌우는 ‘미들(middle) 미디어’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조영남씨가 포코의 시 오브 핫브레이크(Sea Of Heartbreak)를 피아노로 연주할 때 제가 사회를 보고는, 출연료 300원을 받아 실컷 막걸리를 마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박상규, 장우(코코장) 등 코코브러더스, 김상국씨가 출연했고, 고등학생이던 문주란씨가 막 상경해 데뷔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종로구 서린동 스타더스트호텔 건물 뒤쪽 1층의 세시봉과, 종로2가 YMCA 옆 골목 안 건물 1층의 ‘디 쉐네(Die Schone)’는 음악감상실로 쌍벽을 이뤘지요. 세시봉이 정적이었다면 디 쉐네는 자유분방한 동적인 분위기로 대조적이었습니다. 그 중간에 클래식한 분위기의 ‘르네상스’와 다른 음악감상실보다 일찍 간판을 내린 명동의 ‘시보네(Siboney)’ 음악감상실이 있었습니다.”

이들 음악감상실은 당시 까까머리 고3생들이 졸업 후 찾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디 쉐네는 유일하게 여성 DJ가 활동했으며, 매주 트위스트·고고 파티를 열어 장안의 끼 많은 청춘들을 유혹했다. 당시 무명의 조용필이 이곳에서 꿈을 키우기도 했다.

구 극장장은 송창식, 윤형주가 세시봉을 드나들 즈음 군복무를 위해 DJ 자리를 접었고, 제대 후 충무로 태극당 삼익피아노 지하실의 ‘르 시랑스(Le Silence)’등에서 DJ활동을 재개한다. 그는 제대 후 1971년 르 시랑스에서 다시 DJ를 맡았다. 르 시랑스의 김민기, 김도향, 양병집 등이 세시봉의 맥을 이어갔다.

“르 시랑스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갔는데, 이백천 선생이 어느 여름날 양병집씨에게 양말을 벗고 대야에 발을 씻은 후 들어오게 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지하실에 퍼져앉아 어니언스, 양병집, 서유석, 김민기씨 등이 모여 마치 놀이를 즐기듯, 기획되지 않는 즉흥적인 라이브 무대를 펼치곤 했지요.”

당시 르 시랑스 옆건물 1층에는 남성 출입금지 구역인 여성 전용 다방이 있었다. 1970년대 초 여성들의 해방구 옆에 자리잡은 ‘물좋은’ 문화공간으로, 젊은이들의 놀이터 겸 쉼터로 인기를 끌게 된다.

구 극장장은 2008년 명동예술극장 극장장, 2010년에는 재단법인 국립극단 이사장을 맡은 후 명동극장과 국립극장을 안정적 궤도에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국립극단 재단법인화 후 작품의 예술성과 수익 창출을 위한 재미 등 두마리 토끼를 쫓아야 하는 입장이다.

통기타 음악에서 연극으로 화제를 돌렸다. 올해로 개관 2년째로 이른 기간에 명동예술극장이 자리잡은 비결이 궁금했다.

“재개관하면서 첫 목표는 선배들의 예술혼을 계승하고, 연극 관객 확대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극장예술이 시민들에게 영감과 감동, 위안을 안겨주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 아니겠어요. 주로 젊은층에 한정됐던 연극 관객을 다변화해 그동안 외곽지대에 머물던 중장년 이상을 극장의 새로운 관객으로 모시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명동예술극장은 1950년대 말부터 1970년 중반까지 한국연극의 요람으로서 한국연극사를 기록해온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 극장이다. 국립극단을 비롯해 실험극장을 시작으로 민중, 산하, 자유, 여인극장, 동인극단, 광장 등 민간 동인제극단이 잇달아 창단돼 활발한 공연활동을 하고, 차범석, 이재현, 노경식, 윤대성, 정하연, 조성현, 전진호 등 극작가들의 창작극은 물론, 서양의 고전과 신작들이 상연돼 오늘의 한국연극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한 핵심 극장이다. 그는 “명동예술극장 수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구 극장장이 2008년 취임 후 연극의 명품화와 대중화를 위해 띄운 승부수는 고전 공연이었다. “레퍼터리 구성을 고전을 중심으로 해 학생부터 어르신들까지 편안하게 접근하도록 유도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나름대로 시민들이 요구하는 재미와 시민들에게 필요한 가치를 함께 실현하겠다는 의도였는데, 유일하게 대관 없는 공립극장으로서 공연의 질을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의도가 어필한 것 같습니다.”

그는 “극장예술은 관객과의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연극은 평론가는 물론이고 대중들도 외면하게 된다”며 “화려한 무대 메커니즘과 음악, 춤 등으로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는 뮤지컬과 같은 접근으로는 연극의 관객몰이가 쉽지 않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당대인들의 삶과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필수적입니다. 고전이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갖는 것도 이런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죠.”

―국립극단 이사장직을 겸하고 있는데, 국립극단이 명동예술극장을 주무대로 쓸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려운 점은.

“국립극단 재단법인화에 따른 연극계의 우려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법인화 후 수익에 신경쓰다 보면 공공성을 훼손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지요. 법인화의 핵심은 열정과 능력있는 배우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이상 과열 조짐을 보이는 ‘세시봉’ 붐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는 “시류에 편승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긴 하지만 세시봉 시절 청춘으로서 무대에 섰던 사람들이나 좌석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만나는 ‘세시봉의 밤’ 과 같은 무대를 명동예술극장에서 마련했으면 좋겠다”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최근 ‘세시봉’이 뜨기 전부터 가졌던 생각인데, 지난해 이백천 선생과 김종철 전 연합뉴스 사장 등과 접근성이 좋은 명동예술극장에서 세시봉, 르 시랑스 등 멤버들의 공연을 가지면 어떨까를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차지한 명동에 연세 드신 분들이 올 기회가 적은데,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민기, 양희은, 어니언스, 이연실, 양병집, 이동원, 서유석, 김도향씨 등이 공연하는 기회를 가지면 좋지 않겠어요. 아날로그 통기타 음악 시절 관객들이 음악감상실과 유사한 극장공간에서 낭만의 향취를 만끽하는 멋진 낭만콘서트를 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터뷰 = 정충신 문화부장 csjung@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1974년 극단 민예극장 서울말뚝이(장소현 작, 손진책 연출)공연 후 함께 기념촬영했다. 왼쪽부터 배우 정현, 허규 전 국립극장장(민예극장 대표), 작고한 배우 김흥기, 구자흥, 오승명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