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서울 강남의 한 장소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인터뷰를 마친 후 친남매처럼 손을 꼭 붙잡고 사랑과 희망의 실천을 다짐하고 있다. 신창섭기자 bluesky@munhwa.com

대담 = 양익준검사 채시라탤런트
진행 = 노성열 사회부 차장

열 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을 만나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두 사람이 서로 질문과 대답을 반복했고, 기자는 옆에서 그저 대화를 거들기만 하면 됐다. 공익을 수호하는 추상같은 검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맘씨 좋은 누이를 흠모하는 남동생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구름 속에서 살 것만 같던 꿈속의 여배우도 선머슴처럼 “하하, 깔깔” 마음대로 웃으며 귀여운 동생과 스스럼없이 손을 잡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아이웨딩네트웍스 빌딩에서 ‘사랑’ 채시라씨와 ‘희망’ 양익준(31) 검사를 만났다. 두 사람은 각각 지난해 문화일보 연중기획 시리즈 기사 ‘사랑과 희망의 전령사’에 등장해 훈훈한 사연을 들려주며 독자들의 꽁꽁 언 마음을 녹여 준 바 있다.

채씨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상징인 사랑의 열매 홍보대사직을 올해로 무려 12년째 수행 중이며, 양 검사는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이기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지난해 ‘대한민국 휠체어 검사 1호’로 임관되면서 주위에 희망을 전파시킨 주인공이다.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해 양 검사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방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채씨의 전담 매니저가 약간 숨찬 목소리로 “곧 오실 거예요”라고 전언을 넣었다. 시계를 보니 원래 약속했던 시간에서 불과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정각이었다. 잠시 후 밝은 보라색 재킷 위에 자신의 얼굴만큼이나 하얀 진주목걸이를 걸치고, 청바지에 롱부츠 차림의 경쾌한 복장으로 나타난 채씨는 “총각 검사님과 데이트한다기에 어려 보이려고 신경 좀 썼다”고 농담을 건네며 후훗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감색 양복에 푸른색 줄무늬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전형적인 엘리트 법조인 차림의 양 검사도 “오늘 출근할 때 왠지 옷 고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던데요”하고 웃음으로 받았다.

―두 분의 이력을 살펴보니까 비교적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더군요. ‘사랑과 희망’을 실천하는 여러분의 생활에 종교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설명해 주실래요?

▲채 = “저는 결혼할 때 양쪽 집안의 어머님께서 천주교 신자라서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놓게 됐어요. 임신해서 교리공부를 하고 세례도 받게 됐지요. 세례명은 클로틸다예요. 수사님께 특별히 부탁해서 흔치 않은 예쁜 이름으로, 그 중에서도 남편을 잘되게 한 성녀의 이름을 골라 달라고 했지요. (열녀라는 칭찬에 쑥스러워하며) 종교를 갖게 되면 마음가짐부터 달라지는 것 같아요. 좋은 일을 해야 하니까 한다, 하는 의무적인 차원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된다고 할까요? 우리 주변의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가게 되고요. 이런 걸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고 당연한 일로 생각하게 하는 힘을 주는 거죠. 신앙이란 게.”

▲양 = “저 같은 경우는 다치고 나서 교회를 가게 됐습니다. 신학교를 가려 생각했을 정도로 뒤늦게 흠뻑 빠져들었죠. 우리는 어떤 길을 갈 때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서 인도한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도, 필연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인도를 하십니다. 특히 몹시 어려울 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희망을 주님이 주십니다.”

―채시라씨는 한 단체의 홍보대사를 10년 넘게 하고 있고, 양 검사는 남들보다 3년이나 늦게 대학에 진학해 기필코 고시를 뚫어낸 걸 보니 대단들 하세요.

▲양 = “제가 좀 깡다구가 있습니다. 마산 촌놈 기질이 있어서 나중에 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붙자 하면 ‘좋다 붙자’하고 덤비죠. 예전에 다치기 전에는 성격이 괄괄한 편이었어요. 몸이 불편해지고 난 뒤 사색적이고 보다 신중해졌지만 요즘 검사 업무를 수행하면서 옛날 기질이 살아나는 것 같아요.”

▲채 = “저도 좀 깡이 있어요. 끈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를 시작하면 마무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니까요. 원래 좋은 일이란 끝이 없잖아요? 남을 돕고 베푸는 건 우리 연예인처럼 알려진 위치에서는 당연한 의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세월을 세면서 보낸 건 아니지만 홍보대사직을 하다 보니 어느덧 10년이 넘었네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비리사건이 터진 후 처신이 어렵진 않았나) 물론 내가 얼굴로 있는 단체에서 그런 일이 벌어져 충격을 받았죠. 아주 놀랐어요. 하지만 이 일이 내부에서 자체 점검을 하던 중 드러나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정화할 기회가 된 거지요. 안타깝지만 그래서 내 역할이 더 필요하게 됐어요. 기부나 사랑은 계속돼야 하니까요. 모금 실적이 떨어지면 지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못 받는 상황이 되는데, 이건 안 되죠.”

―양 검사는 이런 비리사건을 수사할 때 혹 온정에 끌리진 않나요.

▲양 = “양심이나 신앙에 저촉되더라도 공익의 대표라는 검사의 직분이 우선입니다. 객관성 유지가 검사의 양심이지요. 물론 수사 진행 상황과 형사처벌을 했을 때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합니다. 도덕적인 비난 가능성은 크지만 형사적 책임은 적은 상황에서 수사를 하고, 구형과 기소를 했을 때 어떤 파장이 있을까 신경을 쓰게 되지요.”

―두 분은 모두 넓은 의미의 공인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통해 ‘사랑의 철학’ ‘희망의 언어’ 같은 것을 만들고 다듬었을 법한데요.

▲채 = “탤런트가 되고 나서 부모님께선 인기를 먹고사는 사람은 무엇보다 그 사랑을 나눠 줘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촬영 일정 때문에 봉사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면 마치 숙제를 못하고 미뤄 놓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고 초조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언젠가 초등학생인 큰딸 아이와 지체장애아 봉사현장에 간 일이 있습니다. 나눔은 누구든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어릴 때 심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눔은 곧 행복’입니다. 도움을 받을 때보다 도움을 줄 때 더 행복해지는 게 바로 사랑의 비밀인 것 같아요.”

▲양 = “저는 몸을 다치기 전엔 몰랐는데 불편해진 다음에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더 힘든 이들을 어떻게 도울까 고민하다 법을 택했습니다. 그러면서 욕심이나 힘에 대한 집착도 많이 사라졌고요. 다치기 전에 가졌던 것을 내버리고 나니까 이전보다 겸손해질 수 있는 지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글쎄요, 어려운 사람들이 저를 보고 희망을 품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실현해 가는 모든 이들이 나의 스승이자 멘토입니다. 주어진 고통을 이겨내고 미래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은 자신의 직업을 천직이라 생각하시나요?

▲양 = “전 장애가 있으니까 솔직히 검사직을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우려가 많았지요. 그런데 사법연수원 교수님이 ‘몸이 불편하니까 업무 수행이나 사회생활이 어려울 수는 있지만 그게 네가 검사를 못할 이유는 아니다’고 조언해 주셨어요. 지금은 ‘검사 되길 잘했다’ 생각합니다. 고통받은 범죄피해자가 진상을 밝혀낸 뒤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면 힘을 얻습니다. 법조인으로 ‘sense of being cause(정정당당)’를 신조로 삼고 있어요. 다치기 전에는 남들보다 잘 먹고, 잘살고 싶다는 욕심이 많았죠. 장애인이 되고 나선 사회에 기여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서 보람을 얻고 싶은 열망이 커지더군요.”

▲채 = “하고 싶은 일요? 호호… 어릴 때는 선생님, 발레리나, 외교관 다 되고 싶었죠. 그런데요, 제가 중2때 학생잡지에 난 광고를 보고 응모를 했는데 이게 당첨된 거예요. 숭인여중 2학년 채시라, 이렇게 이름이 잡지에 실렸어요. 상품을 받으러 갔다가 ‘표지사진 찍자’는 잡지사 기자의 꼬임(?)에 그만 넘어간 겁니다. 집에서 반대했으면 접었을 텐데 예전 꿈이 배우였던 아빠가 ‘추억 삼아 해보지 그래’ 하고 뜻밖에 선선히 허락해 주셔서 그 뒤로 쭉 롯데제과 모델을 거쳐 배우의 길로 들어선 거죠. 일하면서 재미도 있고, 능력 발휘해서 잘한다고 칭찬도 받고 하다 보니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죠?”

―채시라씨에게 가장 기억나는 봉사활동은 뭐였나요?

▲채 = “제게 딸, 아들 남매가 있거든요. 그래선지 어려운 아이들하고 놀아줄 때 제일 좋았어요. 특히 친부모한테 학대를 받아 상처투성이인 애들과 동화책도 읽고 일급 주방장 모셔서 요리도 같이 만들고 하다 보면 같이 웃게 돼요. 웃다가 중간중간 눈물을 참았는데 터지더라고요. 부모 사랑을 못 느껴본 아이들 아니에요? 봉사는커녕 제가 갖고 돌아오는 게 더 많습니다. 1년 365일 하는 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그런데 왜 계속하게 되느냐. 마음에 채워짐을 느끼고 진짜 기쁨을 느끼니까요. 한번은 더운 여름날 봉사 약속이 잡혀 녹화장에서 곧장 달려간 일이 있어요. 100% 분장을 끝내고 갔는데 아이들 목욕을 시켜줘야 하잖아요? 에라, 팔 걷어붙이고 씩씩하게 일하고 나오는데 코디와 스태프들이 울상이에요. 머리니 화장이니 엉망이 됐으니까. 그래도 어떡해요? 내가 즐거운데. 호호.”

▲양 = “채 선생이 배우라는 자기 영역에서 활동하면서도 남에게 베푸는 과정을 보면 ‘나는 너무 나 중심으로 사는 거 아닌가’싶어 낯이 뜨거워집니다. 지금은 일을 배우는 단계이고, 성격상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모두 거절했어요. 부끄러운 일입니다. 앞으로 기회가 생기면 할 의향이 있습니다. 묵묵하게 내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채 = “양 검사님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꿈꾸던 검사라는 직업을 달성하셨잖아요?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에 희망을 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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