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남해 금산의 보리암에서 마주한 일출 순간. 보리암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높이가 주는 시야와 절집을 감도는 고즈넉한 새벽 기운이 함께 어우러져 유독 여운이 길다.

여명의 푸른 기운이 번져가는 남해 금산 보리암. 절집 뒤쪽 해수관음상 앞 깎아지른 난간에 홀로 기대선 푸른 눈을 가진 이국의 젊은이는 ‘거의 울 뻔했다’고 했습니다. 암자의 난간에서 남쪽 바다를 내려다보던 그가 어찌나 자주 ‘아름답다’는 찬사를 토해놓던지요. 프랑스에서 날아와 한달 일정으로 한국을 여행하고 있다는 그는 부산에 이어 경주, 그리고 세번째로 이곳 남해를 택했다는데, 이곳에서 그는 금산을 두고 ‘궁극의 자연풍경’이라고 했습니다. 남방불교의 명상수행법인 ‘위파사나’에 심취했다는 그는 동쪽 바다를 달구며 떠오르는 일출 앞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남해의 금산. 사실 금산을 찾는 이들은 죄다 보리암만 둘러보고는 곧 돌아서고 맙니다. 그러나 금산에 올랐다가 보리암만 보고 돌아갔다면, 그건 금산의 손톱만 한 일부분만 보고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금산에서는 암자를 벗어나 능선을 따라 걷는 길에서 오히려 더 많은 절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보통 명소들에서는 ‘8경(景)’을 꼽지만, 금산은 ‘비단 금(錦)’자를 쓴 산답게 ‘38경’이 숨어있습니다. 그 서른여덟곳의 경치를 하나하나 다 짚어볼 수는 없었지만, 기기묘묘한 암봉들로 가득한 금산 풍광의 비범함은 38경이 아니라, 그 2배가 넘는대도 고개가 끄덕여질 것 같았습니다.

대장봉, 형리암, 화엄봉, 일월봉, 삼불암, 촉대봉, 상사암, 농주암…. 이런 절경들은 대부분 보리암 근처에 있어 다 돌아본대도 1시간이면 넉넉합니다. 보리암에서 화엄봉, 일월봉을 지나 능선 끝의 상사암까지 다녀오는 데는 30분 남짓이면 족합니다. 암봉 하나하나를 지날 때마다 그 빼어난 풍광과 이끼가 가득 핀 오래된 전설,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에 탄성이 터집니다. 여기다가 돼지와 코끼리 형상의 암봉 아래 비구니가 거처하던 옛 암자 자리에 들어섰다는 금산산장에 들러서 남쪽 바다를 내려다보며 4대째 빚고 있다는 차가운 청주 한 주전자까지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입니다.

남해에는 또 11월에 ‘걷는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른바 ‘바래길’입니다. ‘바래’란 내다 파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먹을 반찬거리를 구하러 바다에 나가 갯것을 거두는 일을 뜻합니다. 그러니 바래길이란 갯마을의 어머니들이 작은 소쿠리 하나 들고 갯일을 나가던 길인 게지요. 보통 도보여행 길이라면 겨울에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지만, 남쪽 바다를 끼고 걷는 바래길은 따스한 겨울볕 아래 마늘이며 시금치들이 초록을 뿜어대는 밭 이랑 사이를 걷는 코스니 오히려 겨울이 맞춤한 셈입니다.

평산항에서 출발해 가천의 다랭이마을에 가닿는 바래길 1코스는 줄곧 해안을 따라가며 나지막한 언덕을 오를 때마다 뒤로 제가 걸어온 길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답니다. 그 길 위에서 지난 한 해 동안 걸어온 시간과 길을 문득 뒤돌아보게 됩니다.

남해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