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윤 회장과의 만남과 조두식과의 오랜만의 해후 이후에 유미는 조두식과 윤 회장의 관계에 대해 약간의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미의 과거를 단편적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은 조두식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유미가 프랑스로 떠나기 전의 유미 인생의 ‘암흑기’시절을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어쩌다 우연히 ‘수빈’에서 그를 만나게 되어 그가 알게 되었을 뿐. 엄마의 죽음 이후로는 유미 쪽에서는 그에게 일절 연락하지 않았다. 그 이후 그와 접촉한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프랑스로 떠난 이후 지금까지의 유미의 행적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없을 거라는 게 유미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이다.

조두식이 누구인가.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사실 자세히 알지도 못한다. 표리부동하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정체성 자체가 모호한 인간이지만 비굴하면서도 안하무인인 그의 태도는 무언가를 암암리에 말해주곤 했다. 조직의 비호를 받으면서 권력에 기생하는 인간. 유미가 ‘수빈’에서 그야말로 VIP 인사들을 상대로 예약제로 일을 할 때, 어느 날엔가 그를 룸에서 만났던 것이다. 당시 그는 몇 명의 남자들과 함께 왔는데, 그들은 무언가 밀담을 나누고 난 뒤 여흥을 즐기기 위해 유미를 부른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이 구체적으로 뭘 하는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조두식도 말끔하게 차려입고 그들을 사장님이라고 호칭했지만, 유미의 감각으로 그들이 사업을 하는 남자들 같진 않았던 것이다. 그때 조우한 이후로 그는 ‘수빈’에 가끔 찾아왔다. 어떨 때는 아버지로, 어떨 때는 고객으로. 그러나 유미는 그런 그를 상대하기 싫어서 은밀하게 ‘수빈’을 떠나 다른 업소로 옮겨버렸다.

그 이후 유미가 잠깐 업소를 맡아 운영할 때, 술을 대주던 조직과 문제가 생겨 골치를 썩일 때 그 일을 암암리에 해결해준 사람이 알고보니 조두식이었다. 그것도 나중에 지배인을 통해 들은 이야기였다.

조두식은 ‘수빈’ 시절의 홍 마담 언니와 윤규섭 회장이 ‘썸씽’이 있었다는 말을 흘렸다. 그 당시에 유미의 기억으로는 윤 회장을 만난 적은 없다. 유미는 옛날 일기장을 꺼내보았다. 태워버릴까 하다가 그것도 자신의 인생의 한 부분이란 생각으로 몰래 간직하고 있었다. 현재란 늘 과거라는 길을 통해서 다다르는 것이고, 지금의 유미가 있기 위해서는 운명적으로 그 과거를 통과해야 했으니 그 과거가 얼마나 애틋한가. 그러니 과거란 성공한 여배우의 초라한 어머니 같은 것 아닌가. 초라해서 피하고 싶지만 나라는 존재를 있게 한 희생적인 근원처럼.

유미는 일기장 속에서 무언가 단서나 홍 마담의 연락처를 찾고 싶어했으나 온통 어둡고 절망적인 하소연 투성이였다. 당시에는 수첩에다 고객들의 연락처나 신상들을 적어놓기도 했던 것 같건만, 수첩은 버린 지 오래되었다. 다만 당시에 친하게 지내던 ‘실비아’라는 동료의 전화번호가 일기장의 어느 페이지 한쪽 구석에 낙서처럼 적혀 있었다. 그녀의 본명은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긴 당시에는 유미도 ‘나나’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소녀시절 읽은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에서 따온 여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유미는 망설였다. 공연히 기억 속에 완전히 매장한 과거의 무덤을 파헤칠 필요가 있을까? 오래전의 번호가 그녀에게 연결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유미는 011로 시작하는 전화번호를 누르고야 말았다. 신호가 한참 갔다. 별 기대 없이 전화를 끊으려 하는데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