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1970년대 초반 이후 물방울을 그려온 김창열(81) 화백. 40년여 물방울 그림을 발표해온 노화가는 “줄곧 같은 소재를 다루려면 지치지 않느냐”거나 “다른 것을 해보고 싶진 않으냐”는 물음이 익숙한듯 우문현답을 내놨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보면 연애하고 싶지만 와이프가 있어 그렇게 못한다. 화가도 이것저것 할 자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김 화백은 “꾀꼬리는 꾀꼬리대로, 종달새는 종달새대로 우는 게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화가로는 이례적으로 TV의 유리창호 CF에 등장하는 등 대중적 인지도도 높은 ‘물방울 화가’의 근작전이 11월7일까지 서울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열린다. 80대 화가는 지금도 매년 국내외에서 개인전을 1회 이상 열면서 캔버스뿐 아니라 신문지 나무 모래를 비롯해 한지 위에 영롱한 물방울을 실험해 왔다. 이번 전시에는 단 2개의 물방울이 도르르 굴러 내릴 듯한 500호 작품과 황토색 바탕에 그려 넣은 한자 위로 무수한 물방울이 맺혀 있는 듯한 1000호 대작을 포함해 근작 ‘회귀’위주로 50여점을 선보인다.

노화가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로서 총을 맞아 구멍이 뚫린 형상의 작품 ‘상흔’으로부터 상흔 하나하나가 물방울이 됐다”며 작업 초기 심경을 밝혔다. 작가는 “어느 날 물을 뿌린 캔버스 위로 또 다른 큰 세계가 열려 감동을 받았다”며 “어떻게 조형화할지를 고심하며 사진도 찍고 다양하게 시도해 보는 과정에서 물방울 그림이 탄생했다”고 덧붙였다.

‘회귀’란 제목으로 천자문 그림이 집중적으로 선보인 것은 환갑을 지난 1990년 이후다. 화가는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기는 시점인 환갑을 계기로 땅으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의미에서 ‘회귀’란 제목을 붙이게 됐다”고 밝혔다. 한지에 물방울을 그린 것은 신문지 작업이 계기가 됐다. 작가는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운 유년기를 떠올려 한자를 화면에 끌어들인 것. 작가는 한자란 글자를 그림처럼 이미지만 활용할 뿐 구체적 의미를 따지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요즘 손자 보느라 서울 체류기간이 부쩍 늘었다”고 웃는 노화가는 “작업량은 50·60대 시절의 절반 정도로 줄었지만 보는 눈이 풍부해졌다”며 나이듦의 미덕을 일깨웠다.

신세미기자 ssem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