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수도 워싱턴에는 최근 3주일동안 유난히 ‘서울 손님’이 많았다. 국내에서 모두들 천안함의 슬픔속에 빠져있던 시간이다. 워싱턴을 찾은 고위 관리들은 한결같이 천안함 사건에 대한 파장을 우려했지만, 국제외교무대에선 이를 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이명박 대통령부터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임태희 노동부장관 등 워싱턴 땅을 밟은 이들은 시간을 쪼개고 피곤함을 뒤로한 채 한명이라도 더 만나 ‘코리아 세일즈 외교’에 나섰다.

며칠전 발표된 세계은행의 지분 조정은 대표적 사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과 중국, 한국 등 신흥국들이 뒤엉켜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기 위한 치열한 물밑 경쟁이 있었다. 미국이 15.85%로 여전히 거부권이 가능한 15%이상의 지분을 유지한 가운데, 나머지 국가들은 엎치락뒤치락 싸움을 전개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이 일본과 중국의 2위 다툼. 중국이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지분을 인정받으면 6%대의 일본과 비슷해지기 때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만약 중국이 세계은행 지분에서 2위를 차지한다면, 일본의 영향력 축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될 뻔했다. 중국의 양보로 일본이 2위의 체면을 유지했지만, 일본은 이미 지는 태양 같았다.

잇단 워싱턴 국제회의에서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를 들라면, 단연 일본의 위축이다. 세계은행 지분 전쟁에서 가까스로 2위 경제대국의 위상을 유지했다지만, 일본을 주목하는 분위기는 많이 줄어들었다. 12~13일 핵안보정상회의에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총리가 참석했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오죽하면 워싱턴포스트가 만찬장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벼락치기’로 만난 하토야마 총리의 신세를 한심한 듯 비꼬아 외교논란으로 불거지기까지 했을까. 하토야마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개별정상회담을 하지 못한 것을 비롯해 미 언론으로부터도 철저히 배제됐다. 곧이어 열린 주요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도 마찬가지다. 일본 재무장관이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기사는 없다. 본회의에 앞서 열린 농업식량안보기금 출범식에서도 미국과 한국 등이 주도했고, 경제대국 일본은 없었다.

정부의 고위관계자는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일본에 통화스와프를 요청했더니, 점령군처럼 온갖 조건을 요구해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면서 “일본은 아직도 각종 국제회의에서 한국을 많이 견제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연구원은 천안함 사건을 분석하면서 “한미동맹의 힘은 미·일관계가 삐걱대고 있는 것과 확실하게 대비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증현 장관은 일본을 현재의 모습으로만 보는 것을 경계한다. 윤장관은 “지금 잠시 일본이 보이지 않는다고 일본을 가볍게 보는 것은 잘못”이라며 “여전히 일본은 한국과 격차를 10년이상 벌리고 있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라고 말했다.

100년 전 지금. 당시 조선은 외교에서 패배했다. 대문을 걸어잠근 쇄국정책탓에 변화에 늦게 적응했고, 일본에 굴욕적 합방을 당했다. 아찔했던 순간이다. 일본이 100년전만큼의 활기를 찾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동북아질서를 주무르던 그런 외교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대신 한국은 100년만에 처음으로 외교의 활력을 맛보고 있다. 그래도 아직 한국의 갈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세계은행 지분조정에서도 한국은 22위에서 16위로 올라섰을 뿐이다. 지금 한국이 외교무대에서 잠깐 빛을 본다고 해서 자만할 수는 없다. 국제외교에서 아찔한 순간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천영식 / 워싱턴 특파원]] kkach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