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온통 환희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2010밴쿠버동계올림픽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알리고 있다. 동계올림픽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둔 한국의 메달리스트들은 대부분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전후에 태어난 ‘올림픽 베이비’들이다. 이들은 수십년 동안 ‘동양인은 여기까지…’라고 상식화돼온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새로운 세대로 떠오른 이들 ‘88세대’의 조명을 비롯,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얻은 교훈과 과제를 3회에 걸쳐 싣는다.

밴쿠버올림픽에서 한국의 가장 놀랄만한 성적은 스피드스케이팅(빙속)에서 나왔다. 체격조건과 기후 환경에서 빙속 분야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인에게 넘기 어려운 ‘벽’이라는 게 일반적 통념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밴쿠버에서 빙속의 ‘전통 강국’을 모두 넘어뜨리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빙속 남자 10000m 금메달과 5000m 은메달의 주인공인 이승훈(한국체대)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생이다. 그는 한마디로 ‘괴물’이었다. 불과 7개월 전 쇼트트랙에서 빙속으로 전향해 동양인은 불가능하다는 장거리 빙속에서 금·은을 일거에 수확했다. 그는“올림픽에 꼭 참가하고 싶어서”라는 ‘욕망’과 ‘도전정신’ 때문에 겁없이 ‘전공’을 바꾸었다. 남자 500m의 금메달 모태범(1989년생)은 자칭 ‘까칠남’이다.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언론의 무관심을 보고 ‘한번 해보자’는 오기도 생겼다”고 거침없이 토로한다. 외국 기자들에게 “스릴을 즐긴다．자동차, 오토바이에 관심이 있고, 무서운 것에 재미를 느낀다”고 당당히 자기를 소개한다．금메달이 확정된후 머리에 초록색 버섯돌이 모자를 뒤집어 쓰고 나와 태극기를 펄럭이며 스스로를 마음껏 축하하는 춤을 춘다. 시상식 후 “울려고 해도 눈물이 안 난다”며 웃었다.

여자 500m의 금메달 이상화(1989년생) 역시 여성스러운 외모와 달리 당차고 자기표현에 꺼림이 없다. 주변의 ‘철벅지’라는 놀림에 “분명한 것은 제 허벅지 사이즈가 22인치는 아니라는 거예요. 체육과학연구원에서도 재보자고 그랬는데 제가 싫다고 그랬어요”라며 당당하다.

이번 밴쿠버의 ‘여왕’인 김연아(1990년생)는 ‘88세대’의 자신감과 담대함을 종합적으로 보여준 스타다. 우리 국민의 높은 기대감은 김연아에게 막대한 부담이었다. 또 그의 경기에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김연아의 적수는 상대선수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그녀가 금메달을 땄을 때 뉴욕타임스의 “부담감이 그녀를 막지 못했다”는 제목은 적절했다.

이들 ‘88세대’는 ‘국가대표’를 자랑스러워하지만 스스로의 ‘욕망’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 ‘월드 톱’클래스의 서양선수 앞에서 기죽지 않고 오기로 달려들고 그 도전 자체를 즐긴다. 이들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거리 응원을 주도했던 ‘W세대’와는 또 다른 세대의 출현을 보여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스포츠뿐 아니라 한국의 국가적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자신감과 당당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오기로 똘똘 뭉친 88세대가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