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인플루엔자A(H1N1·신종플루) 발생 당시 경제력 있던 서방 국가들이 대량으로 사들였던 백신이 제 3세계에 싼 값에 매각되고 있다. 백신 확보 경쟁에 너도나도 뛰어들었던 지난해와는 대조적인 양상으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치료제 확보전 후유증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유럽 각국이 잇달아 신종플루 백신 잉여분 처리에 나섰다. 프랑스가 공급 과잉으로 당초 주문했던 9400만 회분 가운데 5000만 회분을 취소한다고 밝힌데 이어, 독일은 7일부터 백신 제조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과 역시 과잉 주문한 백신 5000만 회분을 절반으로 줄이기 위한 협상에 들어간다. 스위스,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정부 등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스위스는 지난해 12월 수요를 초과한 450만 회분을 개발도상국에 기부하거나 다른 나라에 팔겠다고 발표했고, 스페인은 백신 미사용분을 백신 제조사에 반납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선진국들의 잉여 백신은 벌써 제 3세계로 팔려나가고 있다. 프랑스는 카타르와 이집트에 주사용 백신 각각 30만개, 200만개씩을 매각했다. 독일 일간지 타게스 슈피겔에 따르면, 베를린 정부는 이란, 이라크, 코소보, 우크라이나, 터키 등에 잉여분 처분을 검토하고 있다. 스페인은 유럽연합(EU)내에도 비교적 경제력이 떨어지는 폴란드, 불가리아 등에 싼 값에 팔 계획이다. 폴란드 등은 신종 플루에 대한 경계가 최고수준인 6단계 ‘대유행’에 이를때까지 예산 부족, 백신 확보 경쟁에 밀려 백신을 구입하지 못했던 국가들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백신 접종률은 각각 7.7%와 10%. 당초 계획에 훨씬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선진국들이 앞다퉈 백신 매각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신종 플루 확산 기미가 주춤했기 때문이다. 계절성 독감보다 치사율이 낮고, 백신에 대한 불신이 여전하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로이터 통신 등은 전했다. 이와 관련 선진국의 백신 과잉 주문에 대한 책임론과 잉여 백신 처분 시기상조론도 일고 있다. 프랑스 야당인 사회당은 정부의 신종플루 대응을 ‘터무니없는 실수’라고 비판하며 의회 차원의 진상 조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책임 논란과 관련 과장된 신종 플루 위협이 선진국의 과잉 구매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세계보건기구는 “전세계에 대한경고는 우리의 의무사항으로 아직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심은정기자 fearless@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