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는 독일 베를린 올림피아 스타디움 뒤쪽에 있는 ‘마라톤 문’. 문 안쪽의 석벽에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의 이름과 국적이 새겨져 있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고 손기정 선수의 이름도 물론 있다. 그러나 손기정의 이름은 ‘기테이 손(Kitei Son)’으로, 국적은 일본으로 표기돼 있다. 경기장을 찾은 독일과 전세계의 육상팬들이 손기정을 일본의 육상 영웅으로 착각할 만한 상황이다.

4선 국회의원 출신의 박영록(87) 전 의원은 1970년 초선의원 시절, 이런 잘못을 바로잡고자 광복절 밤을 ‘거사일’로 정하고 배낭에 끌, 망치, 시멘트를 넣고 경기장에 들어가 손기정의 국적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꾸기도 했다. 박 전 의원이 귀국할 당시 손기정은 김포공항에 마중나와 “부모님도 못하던 일을 해줬다”며 고마워했다. 그러나 야당의원이었던 박 전 의원의 활약을 탐탁해하지 않았던 여당과 정부의 비협조 속에 손기정의 국적표기는 다시 일본으로 바뀌었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홈페이지에 손기정의 이름이 ‘기테이 손’으로, 국적은 일본으로 올라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민간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와 대한체육회가 항의해 이름은 한국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 홈페이지에서 손기정을 검색하면 여전히 ‘기테이 손’이라는 일본식 이름과 함께 일본국적(JPN)으로 나온다.

손기정의 투구반환 운동을 옆에서 도왔던 노순근(62·독일 베를린 거주) 씨는 “손기정 선수는 베를린올림픽 당시 사인을 요구한 독일인들에게 한글로 이름을 적어 주었다”며 “그만큼 손기정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내세우고 싶어한 것”이라고 전했다. 아직 손기정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고 손기정 옹의 영면을 위해서라도 개인의 노력이나 항의에 의해서가 아닌 국가적인 외교력을 동원해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때다.

베를린=이화종 체육부기자 hiromats@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