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사진=신창섭기자

지난 2일 오후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셰리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부인 등 유력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한국 미술작품 전시 및 한식만찬이 열렸다. 한국의 예술작품과 함께 음식문화를 세계에 소개하는 자리다. 이날 만찬 차림은 비빔밥반상, 구절판, 신선로, 잡채, 갈비구이와 쌈, 오미자 화채 등으로 구성됐다. 만찬이 끝난 뒤 블레어 여사를 비롯한 참가 인사들은 자연에 근거한 맛과 예술작품에 비견될 멋과 품위를 갖춘 이날 음식에 대해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날 식단을 디자인한 주인공은 히노컨설팅 대표 겸 오리온제과 및 롸이즈온 개발담당이사 노희영(46·사진)씨다. 행사가 끝난 뒤 미국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 시장조사를 하고 21일 귀국한 그를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 청담동 마켓오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노씨는 국내 최초의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 ‘바스타 파스타’를 비롯해 퓨전레스토랑 ‘궁’, 유기농누들바 ‘호면당’, ‘느리게 걷기’, ‘마켓오’ 등 이름만 대면 아는 독특한 레스토랑을 성공시킨 푸드 컨설턴트로 유명하다.

먼저 조금 생소한 직업인 ‘푸드 컨설턴트’에 대해 묻자 그는 “‘브랜드 컨설턴트’ 또는 먹을거리를 포함한 ‘라이프 컨설턴트’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수정했다.

“삶의 기본이 의식주(衣食住)입니다. 저는 패션디자이너 출신입니다. ‘옷’에서 ‘먹는 것’으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사회의 수준도 이제 입는 데서 먹는 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는 것’에 관해서는 부동산 투자에 머물러 있습니다. 앞으로의 관심은 주(住)입니다. 음식은 공간에서 완성되니까요.”

노씨는 일찍 세계화된 부모님 덕분에 1978년 고교 1년 때 미국에 유학, 남가주대(USC) 의예과를 졸업했다. 소아과 인턴을 하다가 의사를 포기하고 돌연 패션 디자이너로 전공을 바꿨다.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의사는 변호사와 함께 가장 선호하는 직업 가운데 하나다. 그것을 뿌리치고 미래가 불확실한 패션으로 전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애들은 좋아하는데 어디가 아픈지 말도 못하고 아파서 우는 아이들만 보니까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평소 패션에 소질이 좀 있다는 소리를 들어 결단을 내렸지요.”

결단의 배경은 알겠는데 선택의 이유가 립서비스일지도 모르는 주위의 칭찬이어서 용감하다기보다는 좀 무모해 보인다.

“그럴 겁니다. 파슨스디자인학교에 가려고 거기 다니는 친구에게 원서를 부탁했다가 완전 ‘개무시’를 당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기회의 나라’ 미국은 편입이 비교적 쉽습니다. 3개월 동안 보그 등 패션잡지를 열심히 베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보내 조건부 합격을 얻어냈습니다.”

파슨스라면 세계적 명문 디자인학교다. 친구가 ‘개무시’할 만큼 기초가 없는 그의 합격이 조건부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제가 파슨스 교수라도 황당했겠지요. 올A 성적의 인턴 의사가 패션학교에 오겠다면서 패션화보를 잔뜩 베껴왔으니 말이에요. 지금은 창의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데 당시야 뭘 알겠어요. 그저 외우고 베끼는 데 선수였죠. 창의력보다는 해부학으로 단련된 저의 정확한 눈과 끈기를 높이 사서 첫 학기에 2과목 이상 듣고 B학점 이상 받으면 계속 공부할 수 있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합격도 어려웠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지금은 넘치는 창의를 주체할 수 없지만, 당시는 창의력 부족을 절감해야 했다. 스스로 “나는 상상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아메바 또는 벌레가 아닐까”라고 자괴할 정도였다.

더욱 걱정은 라이벌들이었다. 지금도 한국 패션을 장악하고 있는 유명 디자이너들의 자제들이 잘 훈련된 데다가 배경도 든든해 도저히 경쟁의 대상이 되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패션 액세서리, ‘단추’였다.

“도나 캐런이라고 DKNY를 만든 디자이너가 있잖아요. 파슨즈 3학년 때 앤 클라인에 스카우트된 천재 디자이너 캐런이 자기 브랜드를 론칭하며 ‘액세서리, 벨트는 로버트 리 모리스가 만든다’고 했더군요. 바로 그때 하느님이 내가 할 일을 주셨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이때가 1988년 2월이었다. 누가 한국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먼저 시작할까 봐 잠도 자지 못하고 조바심냈다. 노씨는 졸업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4월 부활절 휴가 때 한국으로 시장조사를 나왔다. 백화점 등을 뒤져보니 하용수, 지춘희 등 당시 3개 패션이 자신의 컨셉트와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들을 찾아가 ‘당신들의 패션을 완성시킬 단추’를 제안했다. 당시 국내에는 단추 디자인의 개념이 아직 없을 때여서 하씨 등은 이 ‘당돌한 꼬마’의 제안에 관심을 갖고 시제품을 보자고 했다.

노씨는 서울대 미대 등을 졸업한 친구 공예가(지금은 유명대학 교수다) 2명에게 부탁, 시제품을 만들었다. 아이디어가 있는 디자이너와 살림이 궁한 예술가들의 멋진 궁합이었다. 이 단추들을 가져가니 3명의 디자이너는 너무나 만족, 개당 5000원에 최소 500개씩 1500개를 주문하고 선금으로 1000만원을 줬다. 친구들도 당시로서는 좀 받기가 민망할 정도로 좋은 가격인 개당 500원씩 받았으니 모두 윈-윈하는 흡족한 거래였다.

단추공장을 하며 취미로 식당도 오픈했다. 유학시절 요리하는 것을 워낙 좋아했던 그는 1989년 국내 최초의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 ‘바스타 파스타’, 1997년 퓨전 레스토랑 ‘궁’ 등을 만들어 성공시켰다.

그러나 2000년쯤 모든 것이 싫어졌다.

“사업은 잘 됐지만 너무 많이 벌였습니다. 단추디자인을 10년 했더니 좀 싫증이 났고, 상품을 만들어 파는 것에도 염증이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기업가가 될 준비가 안 됐습니다.”

그는 “장사꾼은 돈을 위해 장사하는 사람이고 기업가는 기업을 숙명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며 “나는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직원들이 저와 밥먹는 것을 꺼리기 시작할 때 너무 우울했습니다. 디자인을 하고 상품을 개발하는 등 제가 좋아하는 일보다 계산하고 도장찍는 일에 더 매달려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정말 하루 아침에 다 닫아 버렸습니다.”

그는 1년6개월을 꼬박 여행을 하며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살았다. 그리고 돌아와 한 지인의 간곡한 제의로 다시 외식업계에 발을 디뎠는데 그게 유기농 퓨전 국수집 ‘호면당’이다. 지분 25%에 상당한 연봉까지 받았으나 동업자와의 불화로 이 역시 하루 아침에 털어버리고 2003년 새로 시작한 것이 유기농 퓨전레스토랑 ‘마켓오’다. 오리온그룹의 식음료사업회사 롸이즈온이 2007년 이를 인수하며 노씨를 개발담당이사로 영입했다.

“저는 좀 더 큰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초코파이’같이 오래가는 브랜드입니다. ‘마켓오’가 그런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결국 대기업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신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롸이즈온은 그가 자신의 사업을 넘긴 이상 곧 떠나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 것으로 생각,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았다. 꼭 1년이 지난 뒤 이화경 롸이즈온 대표가 노씨를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초코파이’처럼 오래가는 과자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가 럭셔리 마케팅 음식이나 알지 과자를 어떻게 아느냐’는 등 사내에 반발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12월 유기농과자 ‘마켓오’가 론칭, 대성공을 거뒀다.

노씨는 열린 브랜드 ‘마켓오’의 성공비결을 묻자 “지금은 재료와 디자인의 혁명시대”라며 “‘마켓오’가 이 흐름에 들어맞은 것”이라고 답했다.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자재와 불조절입니다. 그래서 결국 농업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원판불변 아닙니까. 예쁘면 화장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 과자는 첨가물이 10여가지지만 대부분 30여가지입니다. 딸기우유에 딸기 대신 딸기맛 내는 첨가물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리 것은 그런 화학첨가물이 없습니다. 이것이 도를 깨친 소비자의 입맛에 절묘하게 들어맞은 거지요.”

노씨는 매번 놀라운 변신을 통해 성공한 비결에 대해 “싫증과 변덕 그리고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편집증”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세계 시장에 도전할 것”이라며 “사실 사춘기를 외국에서 보내며 많이 좌절했는데 이제 그들과 한번 정면 승부해볼 자신감이 생겼다”고 또 다시 ‘싫증과 변덕, 편집증’의 기미를 보였다.

노희영씨는…

▲1963년 서울 출생 ▲1980년 미국 크리스천밸리고 졸업 ▲1984년 남가주대(USC) 의예과 졸업 ▲1988년 파슨스디자인학교 졸업 ▲1988년 히노디자인회사 설립 ▲1989년 이탈리안 레스토랑 ‘바스타 파스타’ 오픈 ▲1990년 히노머천다이징 설립 ▲1997년 퓨전레스토랑 ‘궁’ 오픈 ▲1999년 바 ‘휴’ 오픈 ▲2002년 유기농 퓨전누들바 ‘호면당’, 유기농 델리 ‘반’ 기획 및 컨설팅 ▲2003년 유기농 퓨전레스토랑 ‘마켓오’ 오픈 ▲2003년~ 히노컨설팅사 대표 ▲2007년~ 오리온제과 및 롸이즈온 개발담당이사 ▲저서 ‘즐거운 초대요리’(2003년·웅진)

편집국 부국장 hye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