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수환 추기경이 1969년 당시 고교 1학년의 김미화씨에게 써준 메모. 정하종기자

“40년 전 김 추기경이 써준 한 장의 메모가 제 삶의 나침반이 됐어요.”

1969년 고교 1학년 때 천주교의 청소년캠프에 참가했다가 당시 캠프장을 방문한 고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써준 메모 한 장을 40년째 간직하고 있는 김미화(여·56·세실리아·서울 양천구 목동)씨.

“장마에도 끝이 있듯이 고생길에도 끝이 있단다. 1969. 8. 추기경 김수환.”

40년 세월을 지나며 지금은 누렇게 빛이 바랜 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청소년 문제에 늘 깊은 관심을 보여온 김 추기경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또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요즘 우리 모두에게 힘을 주는 내용이어서 ‘현재성’이 있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메모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거의 없던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경기 양평군 용문면에 청소년수련원을 만들어 학생들의 여름방학을 이용해 청소년수련캠프를 열었다. 지금이야 천주교서울대교구 용문청소년수련원이 최신 시설로 잘 지어져 있지만 60년대말 초창기 캠프장은 허허벌판에 식수시설과 화장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환경이었다. 언덕 위에 가건물이 하나 있고 학생들은 텐트를 치고 지냈다. 김씨는 그해 여름 캠프에 참석했었다.

“수련회 기간이 7월말에서 8월초 장마철이어서 계속 장대비가 내렸어요. 텐트에서 자다가 새어들어오는 빗물 때문에 서서 밤을 새우곤 했어요. 모두 몹시 힘들어했지요.”

그때 김 추기경이 캠프장을 방문했다. 그해 5월1일 김 추기경이 로마 베드로대성전에서 추기경서임식을 가졌으니까 추기경에 부임한 지 정확히 3개월이 지난 때였다.

“지금 돌아보면 마흔일곱의 젊은 추기경이셨지요. 추기경 서임 직후여서 분주하실 때였을 텐데 청소년캠핑장을 찾으신 걸 보면 당시부터 청소년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계셨던 거지요.”

8월1일이었다. 추기경은 간이막사에서 혼자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도 추기경은 소탈하고 가깝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노트 한 장을 가지고 가서 사인을 부탁드렸어요. 빙그레 웃으시며 말없이 이 글귀를 적어주셨지요.”

장맛비 속에 고생하는 학생에게 써준 글귀지만 김씨에게는 평생 마음에 담게 된 ‘말씀’이 됐다.

“메모를 받아 간직하면서 김 추기경은 예민한 청소년기의 멘토로 저에게 영원히 남아 계세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나 겪는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만날 때마다 추기경의 글을 보며 견뎌냈어요.”

김씨는 메모의 내용이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요즘 우리 주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김 추기경의 선종을 계기로 ‘김수환홈페이지’(http://cardinalkim.catholic.or.kr) ‘추억의 앨범’게시판에 사진을 올렸다. 메모와 함께 당시 캠프를 찾은 김 추기경을 찍은 희미한 흑백사진 한 장을 더 올려놓았다. ‘젊은’ 김 추기경이 캠프의 가건물 안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빛바랜 사진 속의 추기경은 편안해 보이지만 뭔가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김씨는 “추기경께서 좋은 곳으로 가셨지만 마음이 짠한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이 메모를 계속 간직하며 추기경님을 마음의 빛으로 삼아 살아가겠습니다”고 말했다.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김미화씨가 메모가 들어있는 앨범을 보여주고 있다. 정하종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