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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각광을 받으며 한국 서예의 세계화 시대를 연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60·사진)씨가 최근 중국 허난(河南)성 룽먼(龍門)석굴과 구양(古陽)동굴, 정저우(鄭州)박물관 등을 다녀왔다. 육조체 등 고문(古文)과 다양한 서법을 보고 세계화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다. 정씨는 중국과 일본 중심으로 짜여진 세계 서예계에서 한국 서예의 힘과 아름다움으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7일 오후 그의 작업실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 목멱산방을 찾아 서예에 관해 궁금한 것을 들었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위해 실제 글 쓰는 장면을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정씨는 “좋다”고 시원스럽게 응답하고, 화선지를 펴 문진으로 누르며 혹시라도 서예를 쉽게 볼까 우려해 “쓰는 것은 잠시로, 쉽게 하는 것 같지만 추사(김정희)는 어떤 글자를 30년이 걸려도 못 썼다”고 했다. 고전에서 글자를 일일이 찾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연습에 연습을 더하는 등 끝이 없는 공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별히 선호하는 글은 없다고 했다. 작품이 반복되면 새롭게 조형하는 맛을 잃어버리고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좋아하는 글은 이백의 글 ‘天生我材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하늘이 나를 낸 것은 반드시 쓸데가 있기 때문이다)’이라며 써내려갔다. 그는 전서로 한 획 한 획 꾹꾹 눌러 한 글자를 제법 오래 공들여 쓰고, 붓을 거둔 뒤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음 글자에 들어갔다. 그윽한 묵향(墨香)과 더불어 강한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느껴진다. 그런데 명필이 먹을 뭉텅 찍어 한번에 내쳐 쓰는 ‘일필휘지(一筆揮之)’는 아니다.

“사실 일필휘지는 잘 쓴 글이 아니에요. 글을 잘 쓰려면 최소 40년에서 50년의 적공(積功·공을 쌓음)이 필요합니다. 그러고도 많은 연구와 궁리 끝에 좋은 글이 나옵니다. 일필휘지는 없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일필휘지를 원해요. 외국에서도 데몬스트레이션을 많이 원하는데 하기는 하지만 하기 전에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잘쓴 글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굳이 그 글을 사가는 분이 있습니다.”

화선지도 독특하다. 일반 화선지가 아니라 회색으로 은은하게 물결무늬 같은 문양이 얼핏 암석, 비석, 평연(平硯·물을 묻히면 문양이 드러나는 평평한 벼루)의 느낌이 난다. 글을 완성하고 나니 조형성과 상징성이 재미있게 어울린 멋진 암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별히 주문해 만든 화선지입니다. 그냥 하얀 화선지에 쓰는 것도 전통의 맛이 있지만 새로운 문양을 만들어 쓰면 또 다른 맛이 납니다. 꼭 이것으로 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업실에는 자신이 직접 고안한 화선지 외에 갑골, 돌, 나무 등의 글을 쓰고 새길 수 있는 다양한 재료가 가득하다.

“원래 최초의 글은 거북 껍질에 쓴 갑골문이지요. 이후 은나라에서 청동 등에 금문(金文)을 썼습니다. 그런데 들고 다니기 힘들어 비단과 나무에 썼습니다. 백서와 죽간이지요. 그리고 가장 편리한 종이가 나왔습니다. 소재를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목간이고 도자기고, 돌이고 폭넓게 실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다섯 가지가 있는데 왜 전서로 썼느냐고 물었다.

“가장 원시적이잖아요. 그래서 역으로 현대적으로 표현하기가 좋습니다. 제가 서예가로 비로소 이름을 얻은 1982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도 전서 작품이었습니다.”

글을 쓴 날짜와 장소, 이름을 쓰는 관지(款識)는 행서와 초서를 섞어 썼다. 이유는 힘차고 조형미가 넘치는 전서와 행서가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저런 설명을 들으니 그의 서예 경향은 ‘도(道)’보다는 ‘예(藝)’에 가까운 것 같다.

“도라는 것은 예에 부속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예가 인격 완성의 도구나 그런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그것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술성이 먼저고 도학적인 것은 나중 문제라고 봅니다. 인격 완성을 위해서는 서예 아니라도 할 것이 많지 않습니까.”

소설가 이문열씨는 그의 소설 ‘금시조’에서 도를 중심으로 하는 서예가 석담과 예를 중시하는 제자 고죽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전통예술과 현대예술의 갈등을 장엄하게 조화시켰는데 그의 설명이 꼭 소설 속의 고죽을 닮아 재미있다. 고죽처럼 나중에 용의 눈알을 뽑는 금시조의 기상과 같은 도를 추구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그는 “이(理)와 기(氣)가 둘이면서도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라며 “도와 예는 결국 하나로 행동과 실천을 통해 만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는 서예(書藝), 일본에서는 서도(書道),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고 부른다. 그 차이가 궁금했다.

“중국은 4대문명의 발상지입니다. 중국은 전·예·해·행·초 5체의 서체 변화 등의 연속성을 유지해오다가 (문화혁명 등으로) 끊어졌습니다. 옛것을 숭상해 서법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이 서도라고 하는 것은 검도, 유도, 다도 등 유난히 ‘도’에 대한 의미를 강조하는 일본문화적인 측면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일본에 36년간 치욕을 당하면서 우리 것을 잃지 않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기록성에 대비, 예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일본 서도 작품이 ‘예’의 측면이 강하고, 중국 서법이 ‘도’, 우리 서예가 ‘법’의 느낌이 강해 보인다.

“그렇습니다. 우리 서예가 법의 측면이 강하고, 일본이 전위적인 예의 경향이 많습니다. 중국은 이제 오랜 잠에서 깨 활발하게 다양한 방향을 모색하는데 놀라울 정도입니다.”

사실 서구에서 동양 문화 예술이라고 하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중국과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나라’ 일본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은 역시 ‘조용한 아침’의 나라다. 조금 시끄러워지기는 했지만 문화예술쪽에서 아직 ‘조용한 나라’다. 서예의 경우 중국과 일본이 석권, 한국은 존재조차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의미있는 다양한 활동은 가치를 갖는다. 그는 중국, 일본은 물론 중동과 현대 캘리그래피(calligraphy·문자) 서양화와 경쟁하기 위해 재료에서 부터 법, 도, 예까지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서양의 나이프, 붓이 가장 강하고, 그 다음이 중동, 그리고 동양의 붓이 가장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힘은 거꾸로입니다. 동양의 붓이 가장 강하고, 그 다음이 중동, 서양 순입니다. 특히 동양의 먹은 화선지에 스밉니다. 중동이나 서양처럼 딱딱한 종이나 캔버스에 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하지요.”

그는 프랑스에서 ‘물과 데생전’을 프랑스 캘리그래피 작가와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때 방송 인터뷰에서 서예의 아름다움에 대해 묻기에 “선의 운동감과 여백의 미”라고 했는데 나중에 그 방송을 보니 프랑스 캘리그래피 작가도 똑같은 말을 한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회고했다.

“결국 예술에서 추구하는 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똑같습니다. 방법과 재질의 차이입니다. 동양의 유연한 붓에는 나라는 존재를 넣을 수 있습니다. 특히 스며드는 화선지는 발려서 튀어나오는 서양의 캔버스나 종이와 그 효과가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불 안에서 떠들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나가서 보여주고 느껴야 합니다.”

끝으로 어떤 글이 좋은 글이냐고 묻자 그는 위대한 서예가들의 말로 대신했다.

“당나라 손과정은 ‘머리는 손을 잊어버리고 손은 머리를 잊어버릴 만큼 자연스러운 경지’를 좋은 글이라고 했습니다. 청나라 완백 등석여는 ‘빽빽한 것은 바람도 통하지 못해야 하고 성긴 곳은 말도 달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추사 선생은 ‘허화(虛和)의 경지’를 말했습니다. 그런 작품이면 지금 몰라준다고 해도 100년, 500년 지나도 반드시 구안자(具眼者·눈 밝은 사람)가 찾아낼 겁니다.”

그는 고죽의 ‘예’를 바탕으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붓 하나를 들고 몰아일체(沒我一體), 빈듯하면서도 어울리는(虛和) 석담의 ‘도’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문화부장 hyeon@munhwa.com

사진 = 임정현기자 theos@munhwa.com


■ 소헌 정도준은…
▲1948년 경남 진주 출생 ▲1968년 진주고 졸업 ▲1976년 건국대 경제학과 졸업 ▲2000년 건국대 명예철학박사 ▲1982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수상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1988, 1991, 1993, 1995년) ▲독일 국립 슈투트가르트 미대 명예아카데미회원(1999년) 및 객원교수 ▲국제서법예술연합회 한국본부 ▲서울 서예박물관(2002년) 등 국내 개인전 4회 ▲독일 국립 쿤스트 아카데미 초대전(1999), 프랑스 유네스코 미로갤러리 초대전(2001), 이탈리아 체탈도 시립미술관 초대전(2003), 미국 뉴욕 텐리 갤러리 (2008) 등 해외 초대전 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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