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오면 학원도 빼먹고 몇 시간씩 있어요. 그러면 몇 만원 쓰는 건 금방이죠.”

19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한 허름한 건물 안에는 봄방학을 맞은 초·중학생들 30여명이 모여 유희왕 카드 수백 장을 가지고 게임에 빠져 있었다. 최모(13)군은 “집에는 학원 간다고 하고 학원에는 아파서 못 간다고 하고 친구들과 놀러왔는데 오늘은 운이 따라선지 원하는 카드를 많이 따서 기분이 좋다”며 “지난주에 10만원을 썼는데 오늘 대충 만회한 셈”이라고 말했다.

◆ 어린이용 도박 하우스 = 성인들의 불법 도박 하우스나 카지노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어린이용 도박 하우스가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다. 종목은 수년 전부터 아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유희왕 카드.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의 다른 유희왕 게임장에도 초등학생 10여명이 가득 차있었다. 이곳의 게임룰은 카지노나 도박 하우스와 비슷하다. 하우스비는 없지만 학생들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지갑을 꺼내 새로 나온 카드를 수십 장씩 사서 ‘실탄’을 두둑이 준비한다. 카드에 적힌 공격력과 방어력으로 승부를 가리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카드를 미리 구하는 것이 필수다. 게임에 이겨 다른 사람의 카드를 딴 아이들은 이를 가게에 되팔아 돈을 찾아간다. 게임에 진 아이들은 주인에게서 공격력이 높은 카드를 다시 구입한다.

이모(13)군은 “게임에서 이기려면 좋은 카드가 필요한데 공격력이 높은 카드는 비싸서 10만원짜리도 있다”며 “하루에 적어도 1, 2만원은 쓰는 편”이라고 밝혔다. 현재 유희왕 게임장은 수도권에 30여곳 등 전국적으로 60여곳에 달한다.

◆ 도박 중독증을 보이는 아이들 = 유희왕 카드놀이에 중독돼 일주일에 몇 번씩 게임장을 찾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 둔 오정애(여·48)씨는 “아이가 2년 전부터 유희왕 게임장에 출입했는데 그 뒤로 공부도 잘 안 하고 몰래 학원도 빼먹기 시작했다”면서 “아들 친구들도 마치 도박에 빠진 어른들처럼 게임장을 찾는다”고 말했다. 최모(12)군은 “반에서 2, 3등 했는데 게임을 하면서 10등 밖으로 떨어졌다”며 “하지만 게임을 하지 않는 날은 하루 종일 재미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들 업소들에 대한 단속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경찰 관계자는 “업소들이 문구·완구점으로 사업자 등록을 한 데다 출입 시 돈을 받지 않아 단속할 근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잠재된 사행동기를 촉발시켜 아이들을 도박의 길로 빠지게 만들고 있는 셈”이라며 “기존의 법망을 피해 영업하는 신종 업소들에 대해선 관계 법령의 개정 등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병기기자 mingm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