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신창섭기자

‘기록은 깨지기 위해 있다’는 말이 있지만 한국프로야구에선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은 것들이 몇 있다. 장명부의 한 시즌 최다승(30승), 박철순의 최다연승(22연승), 선동렬의 최저 방어율(0.78), 그리고 백인천의 시즌 최고타율 0.412가 그것들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백인천은 MBC의 감독 겸 선수로 뛰며 총 80경기중 71경기에 출장했고 298타석 250타수 103안타(시즌 1위), 64타점(2위), 55득점(1위), 19홈런(2위), 최다 2루타(23개), 42볼넷(3위)을 기록했다. 첫해 기록한 출루율 0.502, 장타율 0.740은 아직도 역대 1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재일교포를 제외하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62년 2월22일 일본프로야구에 진출, 19년간 활약한 그는 한국프로야구의 ‘진정한 프로 1호’라 할 수 있다.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끝난 다음 날인 지난 18일 그의 사무실인 송파구 가락동 소재 패밀리오피스텔 401호에서 만났다. 42년 9월27일생(호적은 43년생)이니 벌써 65세지만 턱수염을 기른 점을 빼면, 예전과 달라진 점이 별로 없다.

“턱수염은 기른 지 한달쯤 됐어요. 이젠 나이가 좀 들어 보일 때가 돼서….” 굵은 팔뚝과 탄탄한 어깨 때문에 손자가 둘인 ‘할아버지’치곤 너무 젊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이북출신인 백인천은 적산가옥이 많던 서울 장충동에서 살았는데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글러브와 공을 주워 공놀이를 했다. 유명한 야구선수(캐처)출신으로 나중 심판으로도 활약했던 큰형 백인원(작고)씨가 경동고 시절 경기하는 모습을 보고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성동중 야구팀 창단 멤버가 된 백인천은 1학년도 마치지 않고 경동중으로 스카우트됐다.

“처음에는 내야수도 보고 투수도 했어요. 근데 캐처를 보던 친구가 공을 자주 빠뜨려 답답해서 내가 포수를 봤죠. 그 이후 캐처가 됐어요.”

고교시절 스피드스케이팅에서도 올림픽대표를 노렸던 백인천은 캐처들이 대부분 느렸던 것과는 달리 발이 빨랐고 ‘제2회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할 정도로 타격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정확한 타자였지만 경동고 3년때인 60년에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홈런을 날린 최초의 고교선수로 기록될 정도로 장타력까지 겸비했다. 백인천은 동기인 이재환, 오춘삼 등과 ‘무적 경동’시대를 열었고 ‘재일동포 초청대회’를 통해 일본 진출의 기틀을 만들었다.

“고3 때 가을에 동포팀이 내한했어요. 다른 팀들과 13승1무를 기록했는데 마지막으로 우리 학교와 붙었어요. 1-1로 비기자 관중이 재경기를 하라고 아우성을 쳤고 신문사에서도 흥행이 될 것으로 판단, 재경기를 추진했죠. 내가 1회말 결승 투런홈런을 때려 우리가 4-2로 이겼죠.”

이때 동행했던 사이키 가쓰야 일본학생야구연맹 회장은 경동고를 일본으로 불러 초청경기를 주선했다. 경동고는 일본고교팀들과 8전3승3무2패를 기록했다.

“2승2무2패로 팽팽했는데 마지막 게임이 도쿄 니시다상고전이었어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이 자존심 때문에 니시다상고 단일팀이 아니라 도쿄선발팀을 내보냈더군요.” 백인천은 일본원정에서 두 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이중 하나는 진구구장(현 야쿠르트 스왈로스 홈구장)에서 나온 것인데 구장 개장 후 두 번째 홈런이었다.

일본 언론은 프로팀 스카우트들의 분석을 인용해 ‘만약 백인천이 일본 프로팀에 입단한다면 계약금 3000만엔은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대서특필했다. “당시 노무라라는 유망 캐처(현 프로팀 감독)가 있었는데 발이 느렸어요. 일본 신문들은 ‘노무라+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3000만엔 이야기를 보도한 것이죠. 최태환이라는 재일동포께서 그때부터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그 분이 와세다나 메이지대 유학을 권했고 실제 메이지대학의 시마오카 감독은 5년간 보장하겠다며 초청장을 주기도 했어요.”

당시 국교가 없었던 양국의 상황을 보아 일본진출은 이루기 힘들었지만 그는 초청장을 굳게 믿고 대학 필기시험을 보지 않았다. “김일배 감독님이 모교인 연세대 감독으로 부임해서 동기 6명은 연세대로 가기로 했어요. 근데 고려대에서 ‘경동 7인방’이 모두 연대로 가면 다음부터 경동출신은 받질 않겠다고 해서 나만 고대로 가기로 했죠. 시험 날 북한산 흔들바위에 올라가 시간을 보내다 집에 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형이 ‘시험 잘 봤냐’ 묻기에 그럭저럭 봤다고 하자 주먹으로 얼굴을 한방 치데요. 신문기자들이 내가 결시한 것을 알고 ‘다른 학교에 납치된 것이 아닌가’해서 집에 찾아왔었나 봐요.”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농협의 김영조 감독을 찾아갔다. “김 감독님이 ‘네가 온다면 10년 만에 본점 대리 진급, 사택 입주 혜택을 주겠다’는 조건을 말하셨는데 나는 다른 선수와 같은 대우를 해주고 대신 내가 원할 때 무조건 풀어달라는 조건을 내걸었죠.”

19세 때 아시아선수권 대표로 뽑힌 백인천은 대만의 대북 송산구장에서 열린 대회에서 구장 건립 후 첫 홈런이자 마지막 홈런을 기록했다.

“바람이 얼마나 센 지 레프트 홈런성 공이 2루 플라이가 될 정도였죠. 근데 필리핀전에서 내가 타석에 들어서자 일순간 바람이 멈췄어요. 한방 갈긴 것이 홈런이 됐죠.” 한국은 준우승했고 백인천은 ‘베스트 10’에 선발됐다.

“귀국길에 당시는 직항편이 없어 일본을 거쳐 오게 됐는데 미쓰비시중공업팀이 제국호텔에서 만찬을 베풀어줬어요. 최태환씨도 왔는데 ‘대학진학이 무산됐으니 프로팀에 가보라’며 2년 선배인 장훈 형이 있는 도에이팀 관계자들과 만나게 했고 거기서 바로 가계약을 했어요. 계약금은 300만엔이었는데, 보통 일본에서는 10년을 기간으로 보고 계약하는 데 나는 병역문제가 있어 2년 계약으로 된 거죠. 10년에 1000만엔이면 A급인 때라 상당한 대우였다고 생각합니다.”

귀국하자 당시 이주일 최고회의 부의장이 환영식을 열어줬다. 나중에 대한체육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이 부의장은 수훈선수 백인천을 불러 애로사항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 분은 이미 일본 보도를 접하고 상황을 알았던 것 같아요. 내가 이래저래 해서 일본프로팀과 가계약을 했는데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씀드렸죠. 옆에 있던 선우인서 야구협회장이 ‘백인천이 가면 한국 야구가 죽는다. 보내면 안 된다’고 말하자 이 부의장은 ‘왜 눈앞의 것만 생각하느냐’며 꾸지람하며 당시 보좌관이었던 이후락씨에게 ‘여론조사를 해보라’고 시키데요. 사회 주도층 인사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80%가 ‘보내야 한다’고 해 한 달 만에 일본에 갈 수 있었죠.”

백인천은 도에이 2군에서 1년 반을 보냈다. “전 정말 목숨을 걸고 야구를 했어요. 국민들의 성원으로 왔는데 뭔가 성과를 보여야겠다는 ‘사명감’도 있었고. 매일 새벽 5시 반에 기상, 개인훈련을 하고 팀 훈련이나 2군경기가 끝난 후 다시 밤에 개인훈련…. 73㎏가 6개월이 지나자 58㎏가 됐어요. 예전 무장공비 같은 그런 체형 아시겠죠? 1년이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게 지나갔고 2년차가 되자 말과 음식에도 완전 적응했죠. 그리고 선배들의 빨래를 해주고 숙소의 화장실 청소 등 뭐든지 솔선수범해 열심히 했죠. 그러자 팀 내에서 ‘하쿠(白), 괜찮은 놈이야’하는 평판이 나오데요.”

백인천은 일본 진출 1년 반 만에 1군 경기에 나갔다.

“63년 5월22일이에요. 전날 2군 경기에서 내가 굿바이 홈런을 쳤는데 2군 감독이 1군으로 가보라고 하데요. 또 연습공이나 받아주라는 것인가 보다 하고 언더셔츠도 없이 미트만 들고 덜렁덜렁 갔죠. 근데 미즈하라 감독이 ‘너 방망이 한번 쳐 봐’하더니 ‘너 오늘 출전한다’고 해요. 언더셔츠와 유니폼을 급조해서 출전 채비를 갖추는데 땀에 잦은 2군 유니폼을 벗었더니 가슴 맨살에 내 번호인 68번이 찍혀 있어요. 등에는 ‘도에이 플라이어스’가 찍혀 있고…. 당시만 해도 일본도 제품이 엉성해서 잉크가 번져 그렇게 된 것이죠. 난카이 호크스전이었는데 나이트 경기는 처음이었어요. 경기중 미트(포수 글러브)를 댔는데 꼭 공이 빠진 것 같아, 뒤를 돌아봤더니 심판이 ‘너 왜 그래’해요. 공이 뒤에도 없어 미트를 봤더니 그 안에 공이 있어요. 아무튼 정신이 없었어요. 첫 타석에서 공을 때렸는데 감이 좋았어요. 1루를 도는데 관중이 ‘와!’ 하고 함성을 질러 안타인가 생각하고 냅다 2루까지 달렸죠. 2루에 안착했는데 관중석에서 폭소가 터지고 심판이 ‘너 아웃이야’하더라고요. 우리 쪽 벤치에서도 웃고…. 홈런성이었지만 아깝게 플라이 아웃이 됐는데 모르고 달린 것이죠. 사실 공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어떤 볼카운트에서 쳤는지 지금도 몰라요.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백인천은 자신의 야구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노력의 야구’라고 말한다. “일본 진출 첫해 서예를 배웠는데 선생님이 ‘노력자애(努力自愛)’라는 글귀를 주며 ‘노(努)’자를 설명하는데 ‘우(又)’는 일본어로 ‘마타’라고 가랑이를 뜻한데요. 즉 살이 찢어지는 출산의 고통이 ‘노력할 노(努)’ 라는 겁니다. 이후 일생을 통해 노력자애는 내 좌우명이 됐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37세 때인 70년 수위타자(0.340)에 오르는 등 일본생활 19년간 1969경기 출장, 1831안타, 통산타율 0.278, 홈런 209개, 도루 212개, 타점 776을 기록한 그는 81년 한국의 프로야구 출범 소식을 듣고 귀국을 결심했다. “한국에 프로가 생기면 좋겠다고 염원했었고 내가 일본에서 배운 것을 모두 고국에 쏟아붓기 위해 선택한 것이죠.”

하지만 프로야구 팬들에게 백인천의 이미지는 구단과의 잦은 마찰, 그리고 간통사건 등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되고 있을지 모른다.

“한국에 와 보니 프로페셔널리즘이 없었어요. ‘운동선수가 돈 몇 푼 가지고 그러냐’하는 식이었죠. 전 한국 프로야구에 그런 개념을 심어주고 싶었지, 내가 몇 푼 더 받겠다고 구단과 마찰을 빚은 적은 결코 없습니다. LG를 창단 첫해에 우승시키고 구단주에게 건의, 선수들 연봉을 100∼200%나 올려놓았더니 선수들끼리 숙소에서 판돈 몇 백 만원짜리 도박을 해요. 요샌 좀 달라졌겠지만…. 재일동포인 조강지처와 이혼한 것은 제 불찰이지만 바람을 피우다 간통사건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고부갈등이 극에 달해 ‘절대 이혼 안 해주고 끝까지 괴롭히겠다’고 해서 연출한 겁니다. 전처하고도 풀어졌어요. 요즘 간혹 한국에 와서 만나고 그래요. 새 장가 가서 얻은 아들(백현호·19)이 수영선수 박태환이 하고 경기고 동창인데 나를 닮아서인지 빙상 500, 1000m 한국기록을 보유했었죠. 고2때 호주로 골프유학을 보냈어요.”

백인천은 한국 프로야구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관계자 모두가 ‘진정한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프런트, 지도자, 선수가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고 피나는 노력으로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현장 떠난뒤 사업가로, 골프·낚시로 건강 지켜

2003년 롯데감독을 끝으로 프로야구 현장을 떠난 후 백인천씨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한때 뇌출혈로 쓰러졌던 경험 때문인지 건강식품이 주요 사업 아이템.

골프와 낚시를 즐기며 건강차를 즐겨 마시는 것이 그의 건강비결이다.

dylee@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백인천씨가 직접 쓴 사인과 좌우명으로 삼아온 노력자애(努力自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