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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로 전환하기 전 슈퍼리그로 불렸던 배구에서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장신군단’ 현대자동차써비스(현대캐피탈의 전신)는 고려증권에 괴롭힘을 당했다. 고려증권은 창단 초기와는 달리 큰 지원을 받지 못해 노장들과 대기업 팀들이 거들떠보지 않은 선수들로 버텼지만 슈퍼리그 통산 6회라는 최다 우승기록을 수립했다. 이중 4번의 우승은 진준택 감독이 일궈냈다. 현역시절 국가대표팀 부동의 라이트공격수였던 그는 86년 감독으로 취임, 98년 팀이 해체될 때까지 고려증권을 호락호락하지 않은 팀으로 조련해 냈다.

한중대(전 동해대) 스포츠레저학과 교수 겸 여자배구팀 감독을 맡고 있는 진준택(60)씨를 지난달 25일 강원 동해시 지흥동의 한중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삼척 진주초등학교에 다니던 진준택은 어릴 때부터 동기생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 때문에 삼척군대항대회에 나갈 축구와 배구 선수로 뽑혔다. 그러나 정작 대회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막 끝났을 때라 나이 많은 학생들이 많았고 호적도 믿을 수 없다며 엉뚱하게 키 제한이란 걸 만들었어요. 키가 크면 나이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겠죠. 아침을 굶으면 키가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 예선을 앞두고 며칠씩 끼니를 걸렀지만 끝내 키 제한 규정을 통과하지 못했죠.”

60년 배구팀이 있던 삼척중에 입학, 2년 때 배구부에 들어갔다. 왼손잡이여서 라이트공격수가 된 그는 중3때 첫 출전을 한 강원도 춘계대회에서 팀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중3때 벌써 173㎝나 된 그는 속초고, 삼척공고, 북평고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동일계인 삼척고로 진학했다.

고1때 원주에서 열린 강원도대회에서 팀은 결승진출에 실패했지만 인상 깊은 플레이를 했던 탓인지 속초고 김용순 코치가 그에게 다가와 ‘본격적으로 배구를 하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다. “김 코치는 서울 성남고를 나온 스타플레이어 출신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창단을 앞둔 서울 남산공전의 부탁을 받고 유망주를 스카우트하고 있었지요.” 진준택(187㎝)은 고2때 남산공전으로 전학했다.

“내가 187㎝인데 전학가 보니 대부분 190㎝급이에요. 전국의 장신선수들은 다 모아 놨더군요.”

본격적으로 배구를 시작한 진준택은 ‘황금의 왼팔’을 자랑하며 전국체전에서 우승했고 곧 청소년대표로 발탁됐다.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 나갔는데 일본에 져 준우승에 그쳤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배구 강국인 동구권과는 교류를 할 수 없어 일본을 통해 선진 배구를 배웠지요. 나는 아시안게임에 선수로 3번, 지도자로 3번 등 모두 6번, 유니버시아드대회에 3번이나 출전했는데 모두 준우승에 그쳤어요. 당시 일본배구는 72년 뮌헨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등 세계최강의 실력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일본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벽을 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진준택은 고3때 아시아청소년선수권을 다녀온 후 66년 방콕아시안게임에 출전할 24명의 국가대표 예비후보에 뽑혔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 라이트에는 이각금, 박서광 등 쟁쟁한 선배들이 포진하고 있어 그가 베스트멤버가 될 기회는 거의 없어 보였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대표팀은 일본 실업팀 토레이와 친선경기를 했다. 부담 없는 경기여서인지 진준택이 투입됐는데 이 게임은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알리는 무대였다.

이때부터 77년까지 장장 11년간 대표팀의 라이트는 부동이었다. 나중 실업팀에서 라이벌 관계가 된 이인(전 현대차 감독)은 진준택 때문에 기나긴 2인자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진준택이 그렇게 오랫동안 라이트를 도맡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글쎄, 나를 막았던 상대팀 선수들 이야기로는 ‘때리는 폭이 넓다’고 하데요. 공격범위가 넓으니 상대 블로커들이 잡지 못했던 것이죠.” 이 말은 곧 배구를 보는 눈이 넓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고 지도자로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체신부-봉명광업-충주비료(한국종합화학)에서 실업선수 생활을 한 진준택은 77년 은퇴했다. 종합화학 코치로 지도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81년 카타르대표팀 감독을 맡아 해외진출을 하게 된다.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 카타르를 사상 처음 8강까지 진출시킨 그는 85년 귀국했고 이듬해 고려증권 감독을 맡았다.

고려증권은 83년 현대차와 같이 창단하면서 장윤창, 유중탁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받았고 1, 2회 대통령배(슈퍼리그 전신)를 제패했다. 그러나 진준택이 부임할 즈음에는 투자부족으로 점차 힘이 빠지고 있었다. 현대차는 3~5회 대통령배에서 3연패했다. 그러나 진준택은 88~89시즌 제6회 대통령배에서 감독 데뷔 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 ‘노인들로 버티는 팀’이라며 팬들의 조롱을 받았던 고려증권의 기적 같은 정상 탈환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일본이 뮌헨올림픽에서 우승할 때 봤는데 아예 기계나 다름없더라고요. 한국은 당시 7위에 그쳤는데 일본을 보면서 ‘배구는 기본적으로 콤비플레이다’라는 지론을 갖게 됐죠. 콤비플레이의 핵심은 역시 세터죠. 그래서 이경석을 닦달했죠. 이 친구가 원래 약간 느린 데다 게으르기까지 했어요. 얼마나 야단을 많이 맞았는지 ‘선생님은 왜 나만 미워합니까’ 하며 울 정도였어요. 노장들이지만 스파르타식으로 조련했죠. 또 수비전문 홍해천의 존재가 사실상 결정적인 요인이었죠. 182㎝의 단신인 홍해천은 공격력이 없어 경기대 시절부터 빛을 보지 못했고 다른 실업팀도 눈여겨보지 않았죠. 하지만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선수라고 판단해 스카우트했어요. 당시에 리베로 제도가 있었다면 홍해천은 아마 세계 최고의 리베로가 됐을 겁니다. 6회 대통령배에서 고려증권은 전승 우승을 차지했죠.”

고려증권의 우승기록을 보면 2연패는 있어도 3연패는 없다. 장기시리즈에서 조직력만 갖고는 스타 군단과 대적하기에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 7회 대통령배는 여세를 몰아 정상을 지켰지만 다음 두 시즌에는 유중탁과 장윤창이 차례로 은퇴하며 정상에서 내몰렸다. 한양대 출신 레프트 이재필이 가세한 후 10회 대회(92~93시즌)에서 우승했다.

고려증권이 마지막 우승을 차지한 95~96년 대회(94년부터 슈퍼리그로 개칭) 결승은 올드 팬이라면 지금도 남자배구 최고의 경기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명승부. 그때 현대차의 전력은 206㎝의 장신센터 제희경이 벤치 멤버였을 정도였다.

홍익대 시절 별다른 활약을 못한 무명 이수동이 결승의 히어로였다. “수동이는 팔이 길어서 데려왔어요. 수비도 앞으로 오는 것만 잡으려 하고…. 이런 몇 가지 단점을 고쳐주자 제 몫을 하더군요.”

진준택은 이경석-이성희로 이어지는 확실한 세터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았던 선수를 다듬고, 상대공격을 징글맞게도 걷어 올리는 수비조직력으로 자칫 현대차의 10년 아성이 될 뻔했던 80~90년대 한국남자배구를 활기 있게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진준택은 쓸쓸하게 코트를 떠났다. 회사의 부도로 98년 팀이 해체됐고 배구협회가 출전비를 지원해 97~98시즌을 마지막으로 뛰었다.

“회사를 잃은 고려증권 사원들이 배구장에 응원을 많이 와 주셨지요. 고려증권이라는 회사이름이 붙은 유니폼이라도 보며 설움을 달래려던 그들을 ‘넥타이 부대’라고 했지요. 인수할 기업이 나오지 않자 선수들이 좌절하기 시작하더군요. 결국 겨우 4강에 진입하는 걸로 끝나고 말았죠.”

협회에서 대표팀을 맡겨 98월드리그와 방콕아시안게임(준우승)에 나간 그는 2001년 동해대 교수가 됐다. “홍희표 삼척 광희학원 이사장이자 동해대 설립자께서 찾아와 대학팀을 창단하시겠다며 교수 겸 감독을 맡아달라고 하데요. 배구에 관심이 많아 광희고를 배구명문으로 키운 분인데, 저는 현실적으로 지방대에서 남자팀은 무리라고 설명 드리고 여자팀을 해보자고 했죠.”

34세 때인 81년 사촌누나의 소개로 만난 변애자(53)씨와 결혼한 그는 1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상원(26·195㎝)이는 배구가 아닌 농구선수다. 연세대를 거쳐 KCC에 입단했는데 작년 무릎 십자인대가 끊기는 중상으로 현재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아들을 왜 배구가 아닌 농구를 시켰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내 뜻이 아닙니다. 상원이가 처음에는 야구를 하고 싶다고 하더니 휘문중에 다닐 때 한창 인기를 끈 농구 드라마를 보더니 농구를 택했어요.”

프로배구 LIG가 신영철 감독을 하차시키고 신임 감독을 구하고 있을 때, 팬들은 인터넷상에서 이를 놓고 설전을 펼쳤는데 진준택을 잊지 않고 적극 추천한 팬들이 많았다. “허허…. 지방대가 어렵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직장인데. 하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평생 해온 배구가 지금도 머리와 가슴속에 살아있으니까요.”

동해 = dy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