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사진=박상문기자

1970~80년대 여자농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정미라(51)는 여자선수로는 처음으로 ‘더블클러치(이중점프)’를 구사했고 중거리슛의 명수였다. 하지만 138㎝의 작은 키 때문에 5년간을 벤치워머로 지냈던 무명시절을 겪었다. 그러나 이같은 설움이 있었기에 그는 스타가 됐고 선수생명이 끝날 뻔한 심각한 부상도 이겨냈다. 두 자녀의 어머니가 된 지금도 해설가로 농구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를 지난 10일 문화일보 인근 커피숍에서 만났다.

정미라는 농구의 피를 이어 받았다. 외삼촌 윤항섭씨는 40년대 후반 고려대팀의 포워드로 활약했고 은퇴 후에는 심판으로 활동했던 농구 원로. 외사촌 오빠 윤평노(고려대-한국은행), 선노(고려대-기업은행)씨도 대를 이은 농구선수였다. 그러나 7남매중 막내인 정미라는 선천적인 약골이어서 초등학교 시절엔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제가 ‘뺑뺑이’ 1기인데 농구 명문 숭의여중에 배정됐어요. 농구부 신입부원을 뽑는다는 학교방송을 듣고 지원했는데 강당에 가 보니 400여명이나 모였습디다. 저는 138㎝, 28㎏로 전체에서 2번째로 작았어요. ‘작은 애들은 가라’고 하데요. 집에 가서 엄마(윤계희·84)에게 말해 외삼촌 ‘백’을 동원, 농구부에 남게됐죠. 선수가 되겠다는 것 보다는 운동을 하면 밥을 잘 먹지 않을까 해서 지원한거예요.”

‘백’을 써 남았지만 함께 연습할 처지는 아니었다. “훈련시간에 밖에서 구경이나 했죠. 패스연습을 하면 그대로 혼자 따라해 보며. 혼자 노는 것도 지겨워 개인연습을 시작했어요. 매일 새벽 남산순환도로를 뛰었어요. 새벽 로드워크에 이어 혼자 패스와 슛, 드라이브인 연습으로 중 3년을 보냈죠. 여고 입학을 앞두고 숭의여고로 진학하느냐, 다른 학교로 가느냐 기로에 섰어요. 그때까지 남았던 9명의 동기중 숭의여고에는 5명만 갈 수 있었거든요. 근데 감독인 체육선생님이 코치에게 ‘미라는 절대로 다른 학교로 보내지 말라’고 했다네요. 아마 독하게 혼자 훈련해 온 것을 아셨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숭의여고로 진학해서도 여전히 연습생 신세였다. “여고부터는 합숙생활을 했는데 방이 부족하다고 나는 집에서 다녔지요. 1학년 때 다들 대만 전지훈련을 갔는데 나만 가지 못했어요. 키도 자라지 않고…. 2학년이 되어서도 후배들이 너무 잘 해 계속 벤치만 지켰죠. 그래도 개인훈련은 열심히 했어요. 정규 연습시간이 끝나 불도 켜지 못하고 혼자 슈팅연습을 하는데 보름달이 뜨면 림이 잘 보이고, 그믐에는 안 보이고 그랬어요. 지금으로 치면 3점슛 거리에서 중거리슛을 하루 1000번씩 쏘는 훈련을 했죠.”

고2가 끝나갈 무렵 기적처럼 키가 10㎝나 자라 168㎝가 됐다. 코치도 정세훈(고인)으로 바뀌었는데 새 코치에게는 ‘138㎝ 땅꼬마’라는 편견이 없었던지 연습경기에 출전시키기 시작했다.

고3 때 춘계연맹전은 정미라의 데뷔무대. 농구를 시작한지 6년만에 처음 출전한 서울여상전에서 그는 팀 득점의 절반이상을 넣었다. 요즘 용어로는 2번 슈팅가드였던 정미라에 대한 매스컴의 찬사가 쏟아졌다. “5년간의 개인훈련으로 체력 좋지, 키도 커지고, 게임 뛰면서 기술까지 붙자 단번에 돋보이는 선수가 된 것이죠. ‘쟤가 누구냐’, ‘어디 있던 선수냐’하는 놀라움도 있었지만 ‘반짝 스타다’고 혹평하는 시기와 질투도 대단했어요.”

이후 순탄하게 풀렸다. 고3 10월에 열린 실업팀 드래프트에서 당시 여자농구 정상 국민은행의 지명을 받았고 곧이어 대표팀에도 발탁됐다. 태릉선수촌에서도 개인훈련을 쉬지 않았다.

“아침 6시에 기상하는데 나는 5시에 일어나 훈련했어요. 김성집 촌장님이 보시곤 ‘다칠지 모른다’며 관리인에게 체육관 불을 5시에 켜라고 지시하기도 했고요. 당시 가드진에는 좋은 선수가 많았는데 열심히 하니까 빼지를 못하더라고요.”

여자농구는 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돼 국내에서 최고 인기종목으로 발돋움했고 정미라는 선배인 강현숙과 함께 실력과 미모를 갖춘 스타로 떠올랐다.

78년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ABC대회에서 무릎 ~반월판이 파괴되는 부상을 당한 것. “수술을 하면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운동선수로는 끝이라고 하데요. 농구를 계속하고 싶어 물리치료와 침술에 매달렸죠. 무릎주위 근육을 강화시키기 위한 웨이트훈련을 집중적으로 했어요. 아마 5년간의 ‘찬밥’시절, 몸에 밴 인내심이 없었다면 이겨내지 못했을 거예요.” 79년 잠실실내체육관 개관을 기념해 유치한 세계선수권대회는 정미라의 재기무대였다. “첫 게임에서 캐나다에 졌지만 미국을 94-82로 꺾었어요. 골득실차로 미국에 이어 준우승했죠. 한국여자농구가 미국을 누른 것이 그게 마지막이 됐어요. 그 대회에 ‘정미라’라고 쓰여진 피켓을 든 ‘누나 부대’가 처음 출현했지요. 국내 스포츠에서 피켓을 들고 선수개인을 응원한 것은 그게 처음이었어요.”

정미라는 82년 1월 종합선수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체력적으로 2년정도 더 뛸 수 있었는데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로 더 이상은 용납이 안 됐죠. 요즘같이 돈을 많이 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뛰었을텐데…. ‘주부선수’ 전주원이 참 부럽습디다.”

은퇴와 동시에 두살 연상의 김세원씨와 결혼했다.“81년 소속팀이 싱가포르 전지훈련을 갔는데 현지에서 무용부장을 했던 여고동창을 만났어요. 걔 신랑이 너무 멋있어서 ‘저런 사람 소개해 달라’고 장난삼아 말했더니 친구 신랑이 ‘그런 사람이 있다’며 서울 전화번호와 함께 선물로 전해 달라며 티셔츠를 주데요. 서울에 와 만났는데 ‘농구선수 정미라’라고 했는데도 몰라요. 난 정미라하면 대한민국 사람이 다 아는 줄 알았는데…. 게다가 청바지에 딱 달라붙는 티셔츠, 금목걸이를 하고 샌들을 신고 나왔어요. 복학생이라는데 차림새부터 내 타입이 아니더라고요. 나는 심드렁하게 헤어졌는데 죽자살자 쫓아다니는 거예요. 내가 주로 태릉에 있으니까 우리집에 가서 ‘어머니, 어머니’하며 눌러 살았어요. 인연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농구활동하게 해주는게 고맙지요.”

그는 아직도 농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구경만 하던 무명시절 나도 농구를 하고 싶다는 애틋한 감정이 살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오빠와 언니의 아들과 딸 4명이 농구선수를 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보살펴 준다는 핑계로 농구장에 나갔죠. 대신 언니가 살림을 많이 도와주고.”

조카들 핑계를 대고 다시 농구와 연을 이었는데 프로농구연맹(KBL) 통계담당, 방송해설,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 코치, 미국 연수, 여자프로농구연맹(WKBL) 발전위원 등으로 연결되면서 농구와 결혼한 꼴이 되고 말았다.

“삼성 코치를 하면서 모자라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 미국 연수를 가고 싶었어요. 코치하면서 2년이나 집을 비운데다, 아들(김영중·23)은 중국에 유학(중의대)중이고 딸(영선·22·이화여대 체육과)도 미국유학을 준비중이라 나까지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농구를 좋아하는 남편 친구에게 말을 꺼내달라고 부탁했어요. 작전이 성공해서 남편이 ‘공부를 더 해보라’고 하데요. ‘아이들도 나가 있는데 나까지 어떻게…. 정말 가도 돼?’이렇게 해서 2004년 5월 한국여자선수로는 처음으로 농구유학을 떠났죠. 오전에는 워싱턴대학, 오후에는 시애틀농구아카데미에서 공부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무식이 용감’이었죠. 영어도 안들리지, 주위에 아는 사람도 없지, 길도 모르지. 아마 연수기간중 평생 울 것을 다 울었을거예요. 지금까지 나 잘났다고 살아온 것을 다 버리게됐죠. 지금까지 5시즌동안 아카데미에 갔는데 내 농구를 정립하는 좋은 기회가 됐죠.”

정미라는 인터뷰 다음 날 중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그쪽 여자농구를 보고 오겠다는 것. 중국 유학중인 아들을 만날 수 있겠다고 했더니 ‘가는 곳이 달라 힘들 것 같다’고 한다. 그에게 농구는 자식 이상의 것이 아닌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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