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여행이 언제나 행락일 수는 없다. 여행은 어떤 때는 자성의 방편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피난처이기도 하다. 굳이 목적을 따지지 않는 ‘휴식같은 여행’마저도 실은 ‘잘 살기 위한 방편’의 하나다. 잘 살기 위한 방법이 꼭 돈을 벌거나 열심히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를 찾아나서는 여행도 그렇다. 유적지가 즐비한 경주며 안동 등지를 찾아 수백년 전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영감을 얻기도 하고, 삶의 태도를 반성하는 경험도 얻게 된다. 역사의 파편을 하나씩 꿰맞춰나가는 재미가 쏠쏠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역사로의 여행. 새 1000원권 지폐 1장을 들고 경북 안동에서 퇴계의 발자취를 찾아가본다.

#그림 속의 살아 있는 여행지도… 1000원권

1000원짜리 새 지폐가 나온 것을 가장 반긴 사람들은 의외로 안동시청의 공무원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산서원을 찾은 관광객들이 기존의 1000원짜리 지폐를 펼쳐 놓고 실제 풍경과 비교해서 타박을 하는 예가 적지 않았기 때문. 안동시의 한 공무원은 “수년전에 회화나무 거목이 수령을 다해 죽은 뒤부터 “지폐에 그려진 나무를 죽도록 놔뒀다”며 관리부실을 따지는 관광객들의 항의전화에 적잖이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폐의 그림과 하나라도 다른 경우에는 곧바로 민원이 쇄도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도 서운한 마음이 왜 없을까. 도산서원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은 열이면 열 모두 1000원권 지폐를 꺼내보면서 서원을 돌아봤다. 도산서원을 찾은 가족여행객들도 1000원권 지폐를 펴놓고 자녀들과 함께 그림과 실제 건물들의 모습을 짚어가며 비교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공무원들은 물론, 안동시민들도 왠지 뿌듯해지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이른 새벽 청정한 아침 공기 속에서 도산서원에 들러 1000원 구권지폐를 들고 찬찬히 비교해 보았다. 도산서원 문을 들어서 만나는 원뿔 모양의 백송 크기가 사뭇 다르다. 소나무는 원래 청와대 집무실 앞 마당에 있던 것인데, 1970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도산서원의 보수를 기념해 심었다. 그림이 그려지고 23년이 지나 소나무는 훌쩍 키가 커 있었다. 퇴계 종가 문중의 한 관계자는 “후대에 심은 소나무가 너무 크게 자라 전체적인 서원의 분위기를 해친다는 말이 많아 해결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라고 귀띔했다.

# 첫번째 수수께끼… 정선은 왜 퇴계의 모습을 그렸을까

새 1000원권 지폐 뒷면에 실린 그림은 겸재 정선의 그림 ‘계상정거도’다. 이 그림을 그렸을 때 정선의 나이는 71세. 노년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붓질은 힘차고 거침없다. 그림을 보면서 드는 의문 한가지. 금강전도니 인왕제색도니 하는 진경산수화를 주로 그려냈던 정선은 왜 역사적인 인물인 퇴계와 그의 서당을 그렸을까.

이 수수께끼의 해답은 그림이 실려있는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림이 실려 있는 책의 이름은 ‘퇴우이선생진적’. ‘퇴우이선생’이란 이황과 송시열의 아호 ‘퇴계’와 ‘우암’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것. 즉 ‘퇴계와 우암, 두 선생’이란 뜻이다. 이 책은 명가의 글과 그림을 모아 엮은 서화첩이다. 퇴계가 처음 쓴 이 책은 특이하게도 외가에서 외가로 전해 내려갔다. 퇴계의 손자가 외손자에게 전해주고, 그는 다시 사위에게 이 책을 넘겼다. 그 사위가 바로 정선의 외할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는 이 책을 받아들고, 낙향해 은거 중이던 우암 송시열을 찾아가서 책을 보여준다. 외롭게 은거하고 있던 자신을 찾아준 것이 못내 고마웠던 송시열은 책에 발문을 써넣어 주었다.

이렇게 퇴계와 우암의 친필이 실린 책이니, 정선이 얼마나 이 책을 갖고 싶어했을까. 이 마음을 헤아린 정선의 둘째아들이 증조외할아버지를 찾아가서 ‘책을 내어달라’며 설득한다. 외가에서 외가로 전해진 책을 다시 외가쪽으로 넘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정선은 ‘퇴우이선생진적’을 받아든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정선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네 장의 그림을 그려서 책에 붙여넣었다. 책이 전해진 순서대로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정선 자신의 그림을 그려 넣었던 것. 이때 퇴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바로 새 1000원 지폐에 사용된 ‘계상정거도’인 것이다.

# 두번째 수수께끼… 그림 속의 그곳은 계상서당일까

‘계상정거도’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림 속의 한옥 안에서 한 선비가 글을 읽고 있다. 그가 바로 58세 때의 퇴계 이황이다. 그림만으로 퇴계의 나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단서는 바로 그림을 그린 정선이 제시한다. 정선은 이 그림에 “퇴계가 대표작인 ‘주자서절요’를 짓고 있는 장면”이란 설명을 덧붙였다. 주자서절요는 퇴계가 58세 되던 해에 쓴 대표작이니 그림 속의 퇴계 나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58세때 그가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은 바로 ‘계상서당’이다. 계상서당은 퇴계종택 인근에 세워졌던 서당이다. 도산서원의 모체인 ‘도산서당’은 주자서절요를 지은 지 2년 뒤인 60세 되던 해에 완공했다. 그렇다면 주자서절요를 짓고 있는 퇴계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 속의 장소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계상서당’인 것이 명확한 셈이다. 정선이 스스로 붙인 그림의 제목도 ‘계상정거도’가 아닌가.

이곳 계상서당은 퇴계와 율곡 이이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20대의 새파란 나이의 율곡은 외가를 방문하러 안동 쪽으로 왔다가 당대 최고의 학자인 퇴계를 찾아가 계상서당에 머문다. 1000원권 지폐의 모델(퇴계)과 5000원권 지폐의 모델(율곡)의 만남이다. 마침 큰 비가 내렸고, 서당 앞의 개울물이 불어나 퇴계와 율곡은 사흘을 이곳에서 함께 지냈다. 최고 학자로 인정 받던 58세의 퇴계와 약관 23세의 율곡은 빗속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계상서당은 그러나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위치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안동시문화원에 계상서당을 물었지만, ‘모르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렇다면 새 1000원권 지폐에 등장하는 계상서당은 찾을 수 없는 것일까.

# 세번째 수수께끼… 계상서당은 어디에 있었을까

안동의 퇴계 종가를 찾아간 날은 마침 음력 12월7일 퇴계의 기일이었다. 제사를 치르기 위해 퇴계 후손들은 물론이고 먼길을 찾아온 퇴계 제자의 후손들로 온 집안이 북적였다. 자정이 훨씬 넘도록 불이 환히 밝혀진 종가 부엌은 분주했다. 가마솥에는 국이 설설 끓었고, 여자들은 떡이며 돼지고기며 음식들을 날랐다. 마당에 천막을 치고 술상 앞에 둥글게 모여 앉은 종가 어른들에게 계상서당에 대해 물었다. 안동시문화원도, 안동시 문화관광과 직원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내젓던 계상서당. 그 계상서당을 지난 2002년에 문중에서 조용히 복원했다고 했다.

계상서당은 퇴계 종택 앞의 개울가 건너편의 작은 언덕에 퇴계가 낙향 직후 머물렀던 한서암과 함께 세워져 있었다. 서당이 말뜻 그대로 ‘계상(溪上)’에 세워진 것이다.

단정한 기와로 복원된 계상서당의 건물 형태는 1000원권 지폐 속의 건물과 빼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림 속의 장소와는 지형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림 속의 서당은 유장하게 흐르는 강가에 세워져 있었지만, 계상서당은 작은 시냇가 곁에 서 있었다. ‘문헌이나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복원된 위치가 정확지는 않다’고 했지만, 인근에는 서당 좌우에 불쑥 솟은 봉우리며 서당을 끼고 흐르는 물도 없었다. 그림 속의 장소와 같은 곳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결정적인 증언은 복원된 계상서당 기초를 잡은 건축가 김경호씨에게서 나왔다. 그는 “문헌에 따르면 계상서당은 초가였다”며 “당시의 초가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는데, 어느 사이에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기와로 복원돼 안타깝다”고 했다. 그림 속의 장소가 계상서당이 맞다면 계상정거도 속의 서당은 초가집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림 속의 집은 기와집이다. 그림 속의 장소가 계상서당일 것이란 추측도 빗나가 버린 셈이다.

# 네번째 수수께끼… 도산서당과 놀랄 정도로 빼닮았다

새 지폐의 그림을 살펴보던 퇴계 문중 어른들은 “그림 속의 장소는 도산서당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이튿날 만난 안동시청의 학예사도 같은 의견이었다. 서당 앞으로 휘도는 낙동강 물줄기도 똑같았고, 천연대며 운연대의 모습도 비슷했다. 학예사는 “당초 도산서당은 강변길로 드나들었는데, 안동댐이 만들어지면서 낙동강 수위가 높아져 산중턱으로 길을 내고 바닥을 돋워 올렸다”고 했다. 그 말대로라면 그림 속의 서당은 도산서당과 퍼즐처럼 꼭 들어맞는다. 다시 찾아간 도산서원 유물관에 사진이 걸려 있는 강세황의 그림 ‘도산서원도’와 비교해보니, 지형이 거의 똑같았다. 그렇다면 왜 겸재 정선은 퇴계가 58세때의 모습을 그리면서 왜 당시에는 지어지지 않았던 도산서원의 풍경을 그려 넣었을까.

퇴계 문중의 어른들과 안동시청의 학예사가 이런 추론을 내놓는다. “퇴계 이황과 겸재 정선은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다. 계상정거도가 그려진 것은 퇴계가 죽고 177년이 지난 이후에 그려진 것이다. 정선은 생전의 대표작을 집필하던 퇴계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고증없이 퇴계로 대표되는 도산서원을 배경으로 그렸을 것이다.” 이것도 추론일 뿐이긴 하지만, 몇가지 수수께끼의 답변 가운데 가장 타당해보이는 것이다. 1000원권 지폐의 비밀을 찾아나선 여행의 결론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돈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다르겠으나, 돈을 쓰는 사람들에게 사실 지폐그림 속의 공간이 어떤 곳이든 중요할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벼슬자리를 마다하고, 학문에 매달려 재물을 추구하는 것은 유학의 근본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퇴계. 1000원짜리 한장을 쓰면서도 이런 정신을 한번쯤 생각할 수 있다면 족한 것이 아닐까. 이것이 이번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안동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