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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옛 문예진흥원)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김병익(68)씨를 6일 오후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주로 70·80년대 한국문학의 중요한 한 축을 맡았던 문학과지성사의 대표로 기억되지만, 이날 김씨는 한 자유인으로, 긍정적 의미의 엘리트주의자로, 또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도 온건함을 지킨 지성주의자로 다가왔다.

그는 이런 정체성을 만년에 이르도록 성공적으로 유지보수한 보기 드문 사례다. 어쨌든 그는 지금 가장 괴로운 것은 일이고, 가장 즐거운 것은 매주 목요일 문학과지성사에서 이뤄지는 ‘친구들과 놀기’란다. 이만하면 격변하는 한국의 근대를 겪어낸 사람으로는 얼마나 행복한 만년인가.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매일 아침 제 시간에 출근해서 여러가지 행정적인 일을 하다보니, 요즘 인생에서 거의 유일한 즐거움은 목요일에 문학과지성사에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 노는 겁니다. 이젠 정치인들이 골프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때론 풀어놓는 분위기가 왜 필요한지 알 것 같습니다.”

―본인 삶에서 친구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나이 들어서 이른바 ‘폐경기’에 들어가 보니, 여기까지 내가 올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모두 친구들 덕분이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잡지 만들고 출판사 차리고 이렇게 저렇게 일하면서 겪어온 일들을 어떻게 헤쳐나갔나하고 생각하면 모두 친구에 의해서, 그 인연에 의해서 지탱해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참 복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정서적 공감이나 지적 교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의 끈으로 엮어진 친구들 덕분에 여기까지 실려왔습니다. 이런 비유가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을 행운이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저는 이 친구들과 해방과 전쟁, 4·19와 경제성장기 등의 시대를 함께 겪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나는 행운의 시대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다 소중한 인연이겠지만, 그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친구를 든다면 누구입니까.

“현실적으로도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친구는 작고한 김현과 황인철 변호삽니다. 또 지금까지 제 옆에서 공통의 추억을 쌓아가는 친구들은 시인 황동규 정현종, 소설가 홍성원 김원일, 문학평론가 김치수 김주현 등이지요. 물론 이들은 문학으로 맺어진 인연이지만 이제 와서 보니 문학을 넘어서서 서로 깊은 내면까지 들어온 정말 타인이랄 수 없는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입니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겯다’란 말에 공감이 갑니다. 친구들끼리 어깨를 겯고 걸어가는 것, 같이 행진해나가는 것… 우리가 이 ‘겯다’란 동사의 주체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 행복해지지요.”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1975년 동아·조선 사태때 해직돼 문학과지성사를 시작했는데, 이런 인생의 전환기에서 출판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은 선택을 안하려고 했습니다. 친구들은 출판사를 하라고 했지만 저는 안하려 했지요. 그때가 만 38세 되던 해고 신문기자로는 딱 10년 되던 햅니다. 막상 해직 당하고 나니 망연자실했다고 할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당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취직한다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고 출판사를 한다는 것도 느낌이 오지 않았지요. 좀 막연하게 지내고 싶었다고 할까, 좀 더 놀고 싶었지요.”

―누구나 삶에서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 온다고 봅니다. 그럴 때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할 텐데, 선생님은 그런 결정의 순간에 어떤 기준으로 삶의 가닥을 잡았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지나치게 진지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다가오는 문제를 정면으로 부닥치려고 했습니다.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감히 자평할 수 있습니다. 어떤 현실이든 피하지 않고 상대해서 함께 고민하면서 넘어가려 했습니다. 물론 당시는 유신이 절정에 달한 시기로 누구나 진지하지 않으면 안됐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기자에서 해직, 문학과지성사 창립, 문학평론가로 활동,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등의 인생경로를 보면, 굽이굽이 곡절들이야 있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잘 진행된 삶이며, 큰 고난 없이 삶을 경영했다고 봐집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힘든 일은 있었지만, 파탄이 난다든가 추락한다든가, 그 반대로 비약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위 아래 적당한 크기의 밴드 안에서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상당히 온건한 범주에서 평생을 지냈습니다.”

―살다보면 저도 모르게 밴드를 벗어나서 도약하기도 합니다. 자기절제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인생의 기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저는 어떤 쪽으로든지 극단을 싫어합니다. 사는 데나 생각하는 데나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것을 생리적으로 피합니다. 물론 온건함이 가진 한계와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저 자신이 극단적으로 쏠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문학에서는 때론 극단이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만들지 않습니까. 또 문인들과 어울리다보면 극단적인 일탈이랄까 다양한 행태를 보기도 했을 텐데요.

“나는 문인들의 일탈적인 행동이 문학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그렇게 못한다는 것이고 또 그것이 나의 한계란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의 삶을 충분히 존중해줄 수는 있지만 내가 수용하지는 못한다는 거지요.”

―어쩌면 지금 이 시대야말로 또다른 ‘극단의 시대’로 봐집니다.

“이념적 래디컬리즘이 자랑스럽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건 적어도 내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리얼리즘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넘어가면 이건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한국문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금 젊은 세대들의 문학은 세대는 다르지만 한국의 70,80년대 문학이 가졌던 삶의 진정성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봅니다. 말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것은 많이 다르지만, 그 작품들의 바닥에는 고통스러운 삶을 들여다보려는 노력과 그 삶을 껴안으려는 태도가 숨어 있습니다.”

―한국문학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적으로 보시는군요.

“문학의 장래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세대로 봤을 때, 젊은 세대들의 문학이 가진 문학적 지향이랄까 정서의 양상은 여전히 선배 세대의 문학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삶의 깊은 데서 존재의 고통과 씨름하는 진실함은 마찬가지더란 거지요.”

―여전히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고 계시는군요.

“여기서 일한 지 6개월 조금 지났는데 책을 거의 안봤습니다. 요즘 주말에 창작집을 주로 봅니다만 눈은 점점 까다로워집니다. 최근 김중혁의 소설 ‘펭귄뉴스’를 열심히 봤고, 김영하·김연수의 작품에 관심이 가더군요.”

―한국이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엘리티시즘의 긍정적인 역할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삶을 보면 긍정적인 엘리티시즘의 한 사례를 보는 듯합니다.

“제가 엘리트이고 엘리티시즘을 지향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국사회는 기득권자를 곧 엘리트로 혼동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70년대 이후 경제성장을 추진한 세력 중에서 여러 성분이 섞여 있었는데, 그 중 엘리트와 기득권자는 역할과 의미에 따라 잘 구별해야 됩니다. 한국사회의 소수 엘리트들이 근대국가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제대로 평가할 일이라고 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일은 어떻습니까.

“이 나이에 땀을 뻘뻘 흘리고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신문기자할 때나 출판사 할 때나 근무하는 형태는 일종의 자유인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유인의 즐거움을 누려 왔는데 ‘주5일 공인근무’를 하려니 만만찮습니다. 나는 문학을 했던 사람인데 내가 상대하는 사람은 공무원 행정관료들이고 세대적으로도 거의 20년 차이가 나니, 한다리 건너도 안다는 한국사회에서 두다리 건너도 잘 모르는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잘못 끼어들었다는 생각도 들고 어떨 때는 후회도 되고 요즘은 왜 정년이 있어야 되는지 알 것 같습니다.(웃음)”

―계획은.

“14일 친구들과 김현·황인철 묘소에 성묘갈 계획이고, 내가 살고 있는 경기 일산 호수공원을 자유롭게 산책하면서 지낼 수 있기를 가장 바랍니다.”

김병익씨 살아온 길
▲1938년 경북 상주 출생
▲1957년 대전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1965년 동아일보 기자
▲1970년 계간 ‘문학과지성’ 창간
▲1974년 한국기자협회 회장
▲1975년 동아일보 해직
▲1975~2000년 ‘문학과지성’ 대표
▲1998년 출판연구소 이사장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수상:현대문학상(1983),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89),대한민국문학상(1991), 대한민국국민훈장모란장(1995),대산문학상(1997),보관문화훈장(2003)
▲저서:그래도문학이 있어야할이유(2005),21세기를 받아들이기위하여(2001),지식인됨의 괴로움(1996), 열림과 일굼(1991), 들린 시대의 문학(1985),지성과 문학(1982), 상황과 상상력(1979)

배문성 문화부장 msba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