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05년 11월17일 군대를 동원한 일제는 한국대신들을 강압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했다. 을사늑약은 제2차 한·일협약 또는 을사조약으로도 불려온 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나타난 일제의 강제성과 조약 자체의 부당함을 강조하기 위해 최근 들어 많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6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이어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강화조약인 포츠머스 조약 체결(9월)에 성공한 뒤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화하기 위해 11월9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대사로 특파했다.

이토 대사는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주한 일본군 사령관 등과 함께 9일부터 18일까지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한국대신들을 회유·협박하는 작업을 벌였는데, 을사늑약 25년 뒤인 1930년 1월1일부터 3일까지 ‘동아일보’에 ‘한말 정객의 회고담’이란 제목으로 연재된 참정대신 한규설의 증언에 상세한 전말이 나온다.

자신의 처지를 ‘미랭시(未冷屍)’, 즉 식지 않은 송장과 다름없다고 표현한 한규설은 당시 모든 대신이 조약 체결에 반대한다는 결의를 다졌으나 군대까지 동원한 일본의 강압에 의해 조약이 체결됐음을 밝히고 있다.

한규설의 증언에 따르면, 17일 일본공사관에 불려가 회담을 할 당시에도 모두 ‘불가’라고 완강하게 버텼지만 회의가 계속되면서 대신들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공사관에서 돌아와 다시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이 사이 이토와 하야시, 하세가와 등을 비롯한 일본의 외교관과 군인들이 무수히 내전 가까이 들어와 형세가 매우 절박한 지경에 이르렀다.

각 대신이 차례로 의견을 말했는데 학부대신 이완용이 “거절만 한다고 일이 무사할 형세가 아니니 차라리 조문수정을 요구하는 게 낫다”고 말하자 농상공부대신 권중현과 내부대신 이지용도 찬성하는 의견을 밝혀 회의가 혼란에 빠졌다.

만민공론에 부쳐 해결하자며 희의장을 빠져나온 뒤 이토 대사를 만난 한규설은 도장을 찍으라는 요구에 반대했다가 18일 오전 1시30분까지 수옥헌의 마루방에 감금당했다. 외부대신 박제순이 조약서에 도장을 찍어준 뒤 풀려났다.

을사늑약의 부당성은 조약체결 즉시 제기됐다. 프랑스의 국제법학자 프란시스 레이는 1906년 발표한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란 논문에서 협상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은 물론, 조약체결 비준서 등이 국제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며 한글과 일본어로 된 조약문의 첫머리에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는 등 을사늑약을 국제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지난 1993년 미국 컬럼비아대 귀중본도서관에선 고종이 호머 B 헐버트를 통해 9개국 국가원수들에게 을사늑약이 원천 무효임을 알린 영문친서도 발견됐다.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는 지난 1992년부터 원문에 조약의 명칭이 빠져 있고, 황제 비준에 관한 문서가 없는 을사늑약을 비롯, 1904년부터 1910년 사이 한·일간에 체결된 각종 조약의 부당성을 밝히는 연구를 진행중이다.

최근에는 총련계 대학인 일본 조선대 강성은 교수가 이토 특파대사의 수행비서였던 스즈키 게이로쿠(都筑馨六)가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12월8일 일왕에게 올리기 위해 작성한 복명서 초안의 원문사본을 공개했다. 특히 복명서 제24행에‘한국 황제는 대체로 이번 제안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고’라고 쓰여 있었으나 ‘하는 것이 아니고’ 위에 줄을 긋고 바로 옆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으로 고쳐져 있어 당시 일제가 고종의 ‘반대’를 ‘동의’로 수정한 왜곡문서로 주목된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