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패전(종전) 60주년을 맞는 일본의 분위기는 10년 전 패전 50주년 때와 사뭇 다르다. 10년 전에는 이른바 ‘전후 총결산’을 내세우며 과거 일제의 침략행위로 인해 피해를 봤던 주변국과 국민들에게 반성과 사죄의 뜻을 전달하고 나름대로 상처를 어루만지려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언제까지 반성과 사죄를 되풀이해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게 현실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젠 앞을 보고 나아가자는 것이다.

과연 일본은 자신들의 주장처럼 충분히 반성하고 사죄했는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14명의 A급 전범을 합사해 놓은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매년 주변국들의 반발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참배하고 있다. 올해는 전격적으로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 실시를 결정한 고이즈미 총리가 보수층 결집을 위해 8월15일에 맞춰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또 일본인의 긍지를 높이기 위해서라며 주변국의 역사를 멋대로 비하하고, 과거 침략전쟁을 ‘자위를 위한 행위’로 정당화한 우익 교과서가 정치권의 지원을 받으며 교과서 시장에 나왔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제작한 후소샤(扶桑社)판 중학교 역사·공민 교과서는 올해 10% 채택률을 목표로 세확산 운동이 한창이다. 패전 60주년을 맞는 일본의 자화상이다.

◈빗나간 ‘평화국가’의 이상=일본은 패전의 교훈으로 전후 ‘평화국가’의 길을 선택, ‘국제분쟁의 해결수단으로서 무력 사용을 영원히 포기한다’고 헌법에 규정했다. 그러나 패전 50주년을 거치면서 가속화된 ‘보통국가’로의 탈바꿈은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고 있다. 우익세력의 숙원이었던 자위대의 해외파병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국제적 명분을 업고 이미 실현됐으며, 아예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한 방향으로 헌법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이로써 ‘보통국가’란 다름아닌 ‘과거 회귀’이며 ‘군사정치대국의 길’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전범국 일본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겠다는 야심까지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중국 등 이웃나라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 세계 평화와 동북아 안정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이웃나라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은 오직 ‘돈’과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후퇴한 역사인식=일본 중의원은 지난 2일 패전 60주년에 즈음해 과거사 반성을 담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일본의 과거 한시기 행위가 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나라 국민에게 주었던 다대한 고난을 깊이 반성하며 거듭 모든 희생자에게 추도의 정성을 바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결의안에는 지난 1995년 패전 50주년 결의안에 담겼던 ‘식민지 지배’나 ‘침략적 행위’ 등의 구체적 가해 사실이 적시되지 않았다. 야당들이 이에 반발하자 “10년전 결의를 상기한다”는 문구를 집어넣는 것으로 얼버무렸다.

공산당 등은 반성의 표현이 명시돼 있지 않다며 끝내 결의안에 반대했고, 반대로 우익 성향 의원들은 이 정도의 결의마저 ‘국론을 분열시키는 결의’라며 본회의장에서 퇴장해버렸다. 같은 전범국가였던 독일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차이퉁(FAZ)은 다음날 사설에서 “일본 중의원의 결의안은 그릇된 자의식으로 인해 또다시 불쾌감을 주고 있으며 과거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의 과거사 인식이 지난 10년 사이에 또다시 뒷걸음질쳤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내에는 아직도 “식민지 지배로 한국에 좋은 일도 해줬다”는 생각을 가진 세력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이 같은 역사관은 지난 1953년 한·일 수교교섭의 일본측 수석대표였던 구보다 간이치로에 의해 처음 표출된 후 잊힐 만하면 일본 각료와 정치인들의 ‘망언’으로 재연되고 있다.

이런 역사관을 가진 인사들이 일본 주류사회 곳곳에 포진, 힘을 발휘하는 한 한·일간 진정한 선린우호관계 구축은 요원하다는 지적이나오고 있다.

노성열기자 nosr@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