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은 종종 내수기업이란 오해를 받는다. 주력 기업인 SK㈜는 원유를 정제해 석유제품을 국내에 공급해 왔고, SK텔레콤 역시 주로 국내에서 이동통신서비스 사업을 전개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4년 SK그룹의 수출 규모는 131억달러에 달했다. 전년에 비해 63.8% 급증했고, 우리나라의 전체 수출액(2542억달러)의 5.2%를 차지하는 규모다.

사실 SK그룹의 수출 역사는 짧지 않다. 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이 처음 인견직물 10만마(4만6000달러)를 홍콩에 수출한 것이 1962년 4월의 일이다. 이것은 국내 최초의 직물 수출이었고, 당시 사장이던 최종건은 수출 공로를 인정받아 이듬해 광복절에 민간기업 대표로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최종건의 뒤를 이어 선경그룹 회장에 오른 최종현도 1973년 11월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한다. 선경직물은 1976년 1월 계열사인 선일섬유를 흡수 합병하고 상호를 ㈜선경으로 변경, 이듬해 11월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는다. 이후 ㈜선경은 연평균 42%의 수출 신장을 기록하며 1980년에는 4억달러를 돌파했다. 1991년 2월 국내 기업 최초로 중국에 베이징 사무소를 개설한 것도 ㈜선경이다.

그러나 최종현이 구상한 ‘글로벌 경영’은 단순한 수출 규모의 확대가 아니었다. ‘제2창업선언’으로 불리는 1975년 신년사에서 그는 선경을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글로벌 경영 목표를 제시한다. 그것은 세계시장에 내세울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사업의 양성과 국제적 수준의 경영 능력 배양이었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추진된 것이 에너지와 정보통신 사업 진출과 SKMS 정립이다.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최종현은 세계경제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는 세계시장이 하나로 통합될 것을 예견하고 상품의 수출과 함께 전세계에 선경그룹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자 했다. 1996년 5월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주최한 국제교류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금은 민족주의가 약해지고 지역주의와 세계화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이는 국경이 낮아지고 기술·물자·자본·사람이 자유롭게 이동함으로써 마치 한 지역이 한 나라와 같은 영역으로 변화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시아 시장의 성장과 국가들의 공동 번영을 위해서는 일본의 선진 기술과 한국을 비롯한 신흥공업국의 성장 경험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저개발 국가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민간 차원에서 보다 긴밀한 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최종현의 이러한 구상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최태원 회장이 아시아 공동 번영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지식 네트워크’의 건설을 제안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사업은 한국고등교육재단을 통해 구체화했다. 첫번째 사업은 아시아의 젊고 우수한 학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국제학자교류 지원’이었고, 두번째는 아시아 지역 7개국 14개 대학 및 연구소에 ‘아시아연구소’를 설립하는 현지화 사업이었다. 세번째는 이들 사업을 보다 국제화하는 방법으로 베이징포럼과 상하이포럼이라는 연례 국제학술회의를 만들었다.

“문화와 지식의 교류가 이뤄지지 않고서는 공존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 최태원 회장의 생각이었습니다. 학술교류를 통해 서로의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고,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자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일본도 아시아 국가에서 다양한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대부분 특정한 사업 목적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죠. 반면 우리는 철저하게 사업과 분리해서 순수한 학술교류를 추구합니다. 이 때문에 중국이나 베트남, 몽골 등 각국 정부에서도 우리를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김재열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을 추구하는 SK그룹은 수출에 있어서도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바로 기술과 서비스의 수출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유정제 시설을 보유한 SK㈜와 무선통신 분야 노하우를 가진 SK텔레콤은 ‘무형자산 상품화’라는 독특한 수출 전략으로 세계에 진출하고 있다.

SK텔레콤은 2002년부터 이스라엘·대만·태국·카자흐스탄 등에 무선인터넷 플랫폼과 부가서비스를 수출했고, 몽골과 베트남에서는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했다. 중국이 무선인터넷 사업을 위해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 외국인 통신사업자의 투자를 받아들인 것도 SK텔레콤이 처음이다.

SK텔레콤은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시작한 컬러링 서비스도 기술 수출의 쾌거로 평가된다. 미국 최대 이동통신사업자인 버라이즌 와이어리스(Verizon Wireless)를 통해 가입자에게 컬러링 서비스를 제공하고 SK텔레콤은 컬러링 매출의 일정 부분을 지급받는다. 컬러링 솔루션은 이미 베트남·싱가포르·필리핀·인도네시아 등에도 제공되고 있다.

“지금까지 해외진출이 일회성 플랫폼·솔루션 수출이었다면 미국 사업은 장기적인 운영 사업이고, 선진국 시장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사업이 세계 글로벌 기업들과의 협력 모멘텀을 제공할 것으로 봅니다.”(서진우 SK텔레콤 신규사업부문장)

SK㈜는 지난 98년 가나 정유업체와 1200만달러 규모의 중질유 분해 공장 시운전 계약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중국·대만·쿠웨이트·인도 등의 석유화학 기업들에 정유공장 운영 노하우를 수출하고 있다.

SK그룹은 지난해 원유정제와 무선통신 관련 기술 수출을 통해 1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였고, 올해는 2억달러 이상으로 계획하고 있다. 경쟁력의 중심축을 장치산업에서 나오는 유형자산에서 기술과 서비스를 중심으로 한 무형자산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이 SK그룹의 목표다.

SK그룹이 주력 수출 품목인 정보통신 관련 제품의 테스트베드(test-bed)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정보통신 제품이 해외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내 시장에서 신뢰성과 상품성을 입증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권오용 SK기업문화실장은 이에 대해 “SK그룹은 테스트베드 역할을 통해 정보통신 제품의 경쟁력 향상에 일조하고 있다”며 “소비자의 기호가 다양해짐에 따라 첨단 기술이 집약된 정보통신 제품의 수요는 늘어나고, 이에 따라 테스트베드의 중요성도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