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2년 이탈리아 남부 크로토네에서 숙영하고 있던 한니발 장군은 조국 카르타고(현재 북아프리카 튀니지)가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포위당해 있다는 연락을 받자 교착상태에 빠진 이탈리아 전선을 뒤로 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2년)을 사실상 종결지은 역사적인 자마회전을 앞두고 스키피오의 평화제의를 들은 한니발은 “난 로마가 존속하는 한 편안할 수가 없다”며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러나 정작 한니발도 왜 싸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비록 어릴때 했던 맹세와 로마군인들이 자신의 아내 시밀케와 아버지의 묘에 저질렀던 일 등을 싸워야 하는 이유로 스키피오에게 설명했지만. 한니발은 독백한다. “나도 그도 똑같은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주어진 운명과 환경이 우리를 싸움터로 내몬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흔히 ‘한니발 전쟁’ ‘카르타고 전쟁’ 등으로 불리는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2차 포에니 전쟁을 배경으로 쓰인 ‘카르타고 3부작’은 로마가 서구문명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기원전 3~2세기의 역사적인 상황과 함께 희대의 두 영웅인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파노라마를 보듯 생생하게 펼쳐보인다.

100년이 넘는 기간에 3차례에 걸쳐 벌어진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146년)에서 한니발과 스키피오 부자의 2대에 걸친 전장에서의 인연도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던 것처럼 너무나 운명적이다. 3차 포에니 전쟁도 스키피오의 손자인 소(小)스키피오가 주도한 것을 감안하면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스키피오 가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지중해의 통상권과 지배권을 둘러싸고 전통강국 카르타고와 신흥강국 로마가 충돌한 포에니 전쟁 가운데서도 한니발이 출전한 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인들에게 악몽과 같은 사건이었다. 아버지 하밀카르가 에스파냐(스페인)에 건설한 식민지 카르타헤나에서 용병과 코끼리부대를 이끌고 피레네와 알프스산맥을 넘은 한니발이 칸나에 등 이탈리아 전역을 휘저으며 로마를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이후 로마인들이 아이를 어를 때 “한니발이 온다”고 했을 정도로 그는 공포의 존재가 됐다. 그러나 로마에도 스키피오라는 구세주가 있어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제국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상·하)’, ‘카르타고’ 등 모두 4권으로 구성된 소설은 저자 레키가 지난 1995년 영국에서 출간한 ‘한니발’의 성공에 힘입어 3부작으로 완성한 것이다. 98년 ‘스키피오’가 2000년 ‘카르타고’가 출간된 뒤 3부작으로 묶여 미국 등 영어권 국가에 소개되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레키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고전학을 수학한 뒤 농장인부, 저널리스트, 석유시추업자, 학교선생, 카피라이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한 바 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한니발이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한니발’이나 한니발의 지도제작공으로 종군했다가 나중에 스키피오의 비서가 된 보스타르란 인물이 스키피오의 구술을 받아 적는 형식으로 된 ‘스키피오’ 등에서 나타나듯 3부작 소설은 역사소설이 흔히 택하는 전지적 시점이 아닌 1인칭 주인공의 시점을 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주인공들의 성장배경과 숨겨진 행적, 결단과 빛나는 성취, 내면의 갈등과 고통까지 섬세하게 묘사해냄으로써 ‘플루타르코스 영웅전’등에서 신화적 존재가 된 인물들을 지상으로 다시 끌어냄과 동시에 생생한 현장감과 추리적 재미까지 느끼게 해준다.

자마 회전에서 패한 뒤 로마의 추적을 피해 크레타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지를 떠돌며 망명생활을 하다가 흑해 지역의 비티니아섬에서 자결한 한니발이나 포에니 전쟁은 물론 당시 로마의 운명을 결정지은 주요 전쟁에서 승리해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의 정복자)’라는 영예로운 칭호까지 얻었지만 정적인 카토에 의해 탄핵된 뒤 쓸쓸히 숨을 거두는 스키피오의 삶은 독자들에게 인간과 역사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11년 연상인 한니발과 스키피오 모두 같은 해(기원전 182년) 사망한 데서 두 인물을 연결한 운명의 장난을 엿볼 수 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이들의 주요 활약무대인 포에니 전쟁 등은 플루타르코스 이후 여러 저자들에 의해 각색돼왔다. 한니발 전쟁을 다룬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2’나 파트리크 지라르의 역사소설 ‘명장 한니발 이야기’(전3권·이상 한길사)가 이미 시중에 나와 있으며 소설가 이윤기씨가 고전인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완역에 5년째 매달리고 있다. 이창식·정경옥·고형지 옮김.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