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2월 13일, 시인 김남주가 췌장암에 걸려 고통스럽게 죽었다. 그것은 한 시인의 죽음을 넘어,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독특했던 한 시대의 문학이 끝났음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처 무덤에 풀이 돋기도 전에 80년대 문학은 혹독한 비판의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낭만적 세계관, 근거 없는 낙관주의, 융통성 없는 교조주의’의 문학적 외피에 불과했다는 비판부터 일제 강점기 박영희의 저 유명한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고백을 상기시키는 비판까지. 한마디로 80년대 문학은 ‘위엄 있는 퇴각’을 말할 틈조차 없었다.

쏟아져나온 비판 중 압권은 80년대 문학을 이끌어왔던 작가들의 소설쓰기 행태에 대해 내려진 ‘후일담 소설’이라는 진단서였다. 그 말의 메스에 걸리면 아무것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것은 떠나간 기차를 안타깝게 기다리는 시대착오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80년대의 거대한 집단적 의제(擬制) 앞에 숨도 못 쉬던‘개성’들이 그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안한 듯 슬며시 고개를 내민 그 싹들이 어느새 봄날 자운영꽃처럼 문학의 밭 전체를 덮어버렸다. 지극히 사적인 내면 세계를 여과없이 드러내고 불륜, 간통, 이혼 등의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며, 서태지 음악처럼 속도감 있는 문체와 영화처럼 빠른 장면 전환 등 전에 볼 수 없던 변화가 나타났다.

80년대 문학을 주도했던 민족문학 진영 안에서도 자기비판은 신랄했다.

“우리가 해왔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 리얼리즘은, 나중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까지 치닫기 바빴던 그 리얼리즘은 어떤 허위의식이 아니었던가. 감당할 수 없는 노선에 집착했던, 색안경을 쓰고 본 세상은 아니었던가. 사실 첫 장을 읽으면 끝이 너무나 뻔히 보였다. 억눌린 계급의 주인공은 어떤 우여곡절의 과정을 통과하더라도 결국에는 스크럼을 짜고 승리의 그날을 위해 분연히 일어설 터….”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과연 80년대 문학의 진실이었을까.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시를 쓴다면 도대체 그 시는 무엇일 수 있을까.

80년 5월 학살을 겪고 난 이 땅의 문학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자기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로부터 시인은 거리로 나섰고, 소설가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문학의 금도(그런 것이 있다면)에 대해 사유할 여유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집단적 최면’에 걸린 문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를 힘겹게 헤쳐온 작가들을 붙잡고 물어보라. 다시 한번 그런 시대가 찾아오면 어찌 하겠느냐고.

이시영은 김남주의 죽음에 이렇게 조시를 바쳤다.

“너 오늘 겨레의 국토에 묻히는 것/ 영원히 묻히는 것 아니듯/ 너 오늘 우리 가슴에 영원히 묻히는 것 아니다/ 해마다 칠월이 오면 여름산처럼/ 푸르게 산맥 일어서고/ 참다운 해방의 날, 민족의 날이 오면/ 우리의 가슴 속에 살결 속에/ 해일처럼 푸르게 넘쳐 일어설 것이다.”

80년대 문학에 대한 진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도 아마 그 ‘참다운 해방의 날, 민족의 날’이 올 때를 기다려야 하는 일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