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경북 안동의 문화예술회관.

저녁 무렵부터 몰려드는 인파가 굉장했다. 나중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청중들은 호기심어린 눈망울을 굴리며 연단을 주시했다. 이윽고 사회자의 소개로 이날의 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삼 소개가 필요없는, 우리 시대의 시인 김남주 선생님이십니다.”

요란한 박수소리가 좁은 실내를 메우는데, 뒤쪽에서는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어라, 남자였니껴?”

강연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한 여성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난 김남조 샘 강연 들을라꼬 왔는데….”

80년대 후반이면 서울에서는 이미 문학의 큰 흐름이 바뀐 지 오래였다. 각종 발표 지면을 장식하는 대부분의 면면은 이른바 민족문학 진영에 속하는 문인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시대의 변화를 빠르게 읽어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투적’으로 형상화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작품들은 특히 대학가에서 많이 읽혔다. 대학은 80년대 문학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방대한 독서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수한 지하 서클들이 그런 작품들을 지극히 목적의식적인 방식으로 보급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지방은 그런 흐름에서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었는데, 앞에 든 일화는 서울에서 간 문인들이 종종 겪는 웃지 못할 삽화 중 하나였다. 그런 지방 문학판에도 급격한 변화가 초래되기 시작했다.

우선 ‘지방’이라는 말 자체를 폐기하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지방’이라는 말은 ‘중앙’ 즉 서울을 염두에 둔, 보이지 않는 불평등계약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그 경우, 문학의 중심 역시 서울이고, 부산, 대구, 광주까지 포함하는 지방은 서울의 문학을 수입하는 기능밖에 수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지방 자체의 주체적인 문학을 위해서 ‘지방’을 가치중립적인 개념, 즉 ‘지역’으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서울도 수직적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 정부가 아니라 하나의 지역 자치체일 뿐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성 문학지망생들이 자신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원로 문인의 출판기념회의 안내를 맡고, 음식 시중을 들고, 끝 무렵에는 스승의 양 쪽에서(비스듬히 선 채) 기념 사진을 찍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던 지방문학의 오래된 전통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불경스럽게도(?) 청바지를 입은 앳된 얼굴의 여대생들조차 서울에서 강연차 온 연사와 한 탁자에 앉아 감히(?) 민족문학의 미래에 대해 논의를 하곤 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대전의 ‘삶의 문학’, 광주의 ‘용봉문학회, 안동의 ‘참꽃문학회’, 충북과 경북의 ‘분단시대’ 등 각 지역의 젊은 문학동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갑습니다. 서울에서만 살다가 모처럼 이렇게 지방에 내려오니….”

이렇게 운을 뗀 연사는 아무리 내로라 하는 문사라 할지라도, 뒤풀이 자리에서 반드시 준열한(?) 비판을 받게 마련이었다.

“내려오다니 도대체 당신, 아직도 중앙집권적 관행조차 버리지 못하고서 어떻게 민족문학 운운할 수 있소?”

여러 모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지역문학은 80년대 문학의 한 축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