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뉴스 속보가 나왔다. 중앙로역 지하철에 불이 났다고. 그날 저녁 10시50분쯤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미정아. 아버지하고 엄마가 지하철 사고에 연관된거 같다.” 청천벽력같은 소리. 곧바로 예천 집으로 전화를 했다. 아무도 받지 않는다. 아버지, 엄마 안돼 전화 받아 안된다구….

지난해 2·18 대구지하철 참사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박미정(35·주부·대구시 달서구 용산동)씨의 일기장에 적힌 2003년 2월 18일의 기억은 이렇게 끝이 났다. 사망자 192명, 부상자 148명 등 340명의 사상자를 낸 대구지하철참사가 18일로 1주기를 맞는다.

지난해 지하철 참사 때 한사람도 아닌 한꺼번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미정씨의 슬픔은 두배 이상이었다.

4남매의 막내딸. 어릴적에는 ‘막내’라는 이유만으로도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받은 ‘인어공주’속의 막내공주처럼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미정씨.

더욱이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내내 결혼 허락을 받지못하다가 2년전에야 ‘혼인신고’ 허락을 받아낸 미정씨는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털어내기도 전에, 또 못다한 효도를 해드리기도 전에 하늘이 무너진 아픔에 짓눌려 1년을 보냈다.

“원리원칙만을 고집하신 아버지가 우리들의 결혼을 내내 못마땅해 하시더니 큰 아이(10)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인 2001년에야 ‘아비없는 자식 만들 수 없다’며 혼인 신고를 해주셨습니다. 이따끔씩 들르는 친정이지만 돌아올 때는 양식이며, 참기름이며, 참깨까지 챙겨주실 만큼 속정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4남매 중 가장 속을 썩인 막내딸아이가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을까봐 그렇게 잘 해주시고 외손자들, 막내 사위에게도 어깨를 토닥이며 용기를 주셨는데….”

미정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8년이나 늦게 얻은 결혼 승낙으로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 다짐한 막내딸·막내사위(35)에게 보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나버렸다. 고인들은 1년전 2월 18일 심장질환과 심부전증으로 6년동안 매달 정기점진을 함께 받아오던 영남대의료원으로 가기 위해 진천행 1080호에 탑승했던 박인환(당시 67세·경북 예천군 하리면 부초리)씨와 이종금(당시 65세)씨 부부.

그날 오전 7시12분 예천역에서 대구행 열차를 타고 오전 9시42분 대구역에 내렸지만 끝내 2월의 정기검진도 받지 못한채 영원히 미정씨의 가슴에 묻혀 버렸다.

여느 유족과 마찬가지로 사고 다음 날 월배 차량기지를 방문하고 중앙로역을 헤집고 다니던 미정씨는 3월 24일 아버지의 시계와 혁대, 열쇠뭉치, 그리고 엄마의 목걸이와 반지 손톱깎이 등 유류품을 확인하던 날 통곡했던 일이 어제 일만 같다.

더디기만한 사고대책본부와 경찰수사에 항의하기 위해 생전 해보지 못한 시위에 참여했던 날,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맞이한 3월 31일의 어머니 생일날에는 물론, 합동분향소 앞의 벚꽃이 속절없이 피고 지는 것만 봐도 서러워 눈물이 펑펑 솟아올랐다.

신문 1면을 차지하던 지하철참사 관련 기사가 사회의 무관심으로 신문 한 모퉁이에 조그마하게 실리다가 어느날부터 단 한줄도 보이지 않을 때에나, 사고 두달이 지나도록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한데도 벌써부터 보상금얘기가 나돌 때는 세상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불타버린 전동차만큼이나 새카맣게 타들어가던 속을 달래기 위해 술 한잔에 하룻밤을 의지해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던 미정씨에게 사고 70일만인 4월 29일 아버지, 어머니의 타다남은 육신과 유류품을 모아 예천 선산에서 치른 장례식은 현실이었다.

“날씨가 맑다고 택한 장례식날에는 또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리던지…. 빗길 속에서 꽃상여 두개가 나란히 집을 나서 산을 올라갈 때는 떨리고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장례를 치른 뒤 미정씨를 포함한 4남매의 집안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기억은 금기가 돼버렸다. 예고된 길이라면 받아들이기라도 할텐데 아무런 준비조차 없이 그들을 보내야 했으니….

“생각이 나지요. 아버지 어머니의 행동하나, 말투하나, 심지어 어머니의 냄새까지도 생각이 나요. 하지만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들이 터져 나올까, 남매들끼리 만나도 아버지 어머니 얘기가 나올까봐 눈길조차 피하게 되고…. 얘기해야 눈물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애써 지우려고 하는데 이게 또 얼마나 서럽고 서글픈지….”

그래서 혼자서만 얘기하며 울려고 장례식이후부터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 공식 홈페이지(daegusubway.or.kr) 추모게시판을 찾기 시작했다. 자정이 넘어도 보고싶어 잠이 오지 않을 때에도, 아침 내리는 빗소리에 후다닥 잠이 깼을 때에도 어김없이 아버지가 유난히도 좋아했던 꽃 ‘국화두송이’란 이름으로 게시판을 찾아 울고 또 울었다.

늘 보호만 받았던 막내딸. 가슴 가득한 상처를 조금씩 조금씩 털어내면서 건강하게 살아가려는 철부지 막내딸의 안타까움은 일본의 후지TV방송사가 ‘황량한 마음을 꼭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취재하고 싶다’고 요청할 만큼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벌써 가을입니다. 초 봄에 두분을 잃었는데 봄, 여름, 지나 벌써 가을이에요.

저의 곁에서 천년만년 계실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갑자기 예고도 없이 저의 곁을 두분 다 떠나셨네요. 아버지 어머니. 보고싶습니다. 잊고 살기엔 나 자신이 용서가 안되고… 가슴에 새기고 살자니 너무 힘들고…. 하루에도 몇번이고 보고픔에 미쳐 버릴 것 같아요. 두분 사랑합니다. 그곳에선 행복하세요. 막내올림.’

10월 2일 게시판에 ‘잊혀지는게 두렵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이지만 마냥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할머니의 생신을 앞둔 지난해 11월11일.

‘사고가 난후의 가을비는 두분의 그리움과 허무함에 가슴이 아파와요. 아버지 어머니. 알고 계시죠? 며칠 뒤면 할머니 생신이에요. 두분이 계시지 않는 생신이에요. 두분의 얼굴이 선한데…. 어딘가에 살아 계실 것 같은데…. 두분의 목소리가 선명한데….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볼 수도,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가슴을 칩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다음엔 조금 더 씩씩한 막내로 다시 찾아올게요.’

올해부터 미정씨는 아버지,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씩씩하게 살기로 했다. 아버지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서고 싶었지만 이젠끝내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린 가녀린 막내딸이지만 이젠 언니 오빠들에게도 아버지 어머니의 기억을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아버지 어머니. 시간이 많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가슴에만 담고 있으니 더 사무치게 그리워 미쳐 버릴 것 같고…. 그래서 이젠 맘놓고 아버지 어머니 얘기를 할까 합니다.”

대구〓한강우기자 hangang@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