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중반 어느 날, 경기도 어느 한적한 시골역 앞. 가까운 모란공원 묘지로 가기 위해 기차에서 내린 수백 명의 노동자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이미 그곳에도 견고한 저지선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즉각 연좌 농성에 돌입했다. 무리 속에서 한 노동자가 일어섰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왜 여기 왔습니까?” “동지를 묻으려고요.”

“동지가 왜 죽었습니까?” “자본가들 때문에”

“그럼 우리는 그 자본가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내의 일문일답식 선동의 효과는 대단했다. “죽여라!” “싸우자!” “부수자!”는 과격한 고함이 터져나왔다. 광장 한쪽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총무간사 채광석이 함께 있던 후배 문인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쟤가 바로 노해야.”

후배들의 눈이 오백원짜리 동전만큼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후배 문인들은 말로만 듣던,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박노해(사진). 그가 1983년 채광석, 홍일선, 김정환, 황지우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동인지 ‘시와 경제’에 ‘시다의 꿈’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을 때, 그 이름이 ‘노동해방’을 뜻한다는 사실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곧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펴냈다.

그 시집은 광주 이후 미적 질곡의 늪에서 헤매던 한국문학사를 강타한 폭풍이었다. 그건 이제껏 유동우, 석정남, 장명수 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정직하게 써낸 수기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가장 처참한 비극을 형상화할 때에도 용암처럼 꿈틀거리는 분노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별되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계급 전체의 분노임이 너무나 분명했다.

“오! 어머니/ 당신 속엔 우리의 적이 있습니다.”(‘어머니’)

박노해는 확실히 달랐다. 가령 그의 ‘어머니’는 인종과 희생을 숙명으로 여기는 고전적 한국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는 계급의 적과 싸우러 나아가는 노동자들의 발목을 붙잡는 어머니를 새롭게 형상화해 낸 것이었다.

1987년 6월 연세대생 이한열의 장례식이 벌어지던 서울 도심 한복판에는 이미 그런 싸움을 시작한 노동자 계급의 시뻘건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건 바로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가 주도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깃발이었다.

훗날, 많은 문인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조정환, 임규찬, 임홍배와 같은 문학평론가들, 김사인, 이원규, 정우영과 같은 시인들이 특히 사노맹의 문학적 외연인 잡지 ‘노동해방문학’의 발간 작업을 주도했다. 당연히 박노해는 제1급 수배자가 되었다. 그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문인들에게 인편으로 전갈이 왔다. 많은 급전이 필요하다는 것. 가난한 문인들이었지만, 빌려서라도 꽤 큰 돈을 건네주었다.

시장에 가던 원로 소설가 박완서에게도 낯선 젊은이가 찾아왔다. 박완서는 지갑을 열어 10만원권 수표 한 장을 건넸다. 젊은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박노해 동지가 아프다는데 이것밖에….” 박완서는 어이가 없었다.

위기에 몰렸던 박노해의 운동 방식은 문학판 내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그가 체포되었을 때, 그리하여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을 때,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의 석방을 위해 싸워준 것도 바로 문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