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가 지배하는 시대.

한국사람들은 시간을 심각히 생각지 않고 시간관념이 없다고 해서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는 ‘공간적인 가치’를 ‘시간적 가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국사람들은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속해왔던 공간에 의해서 판단해 왔다.

고향이 어디냐, 어느 학교 출신인가, 지금 살고 있는 현주소가 어디인가를 알게 되면 어지간히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나온다는 것이다.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보다도 어느 지방 출신인가에 따라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믿기 어려운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한 때 한국에서 가장 알아주는 값진 사람을 ‘서경덕’(서울대학교, 경기중고등학교, 덕수국민학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후에는 K.S. 마크(경기고, 서울대)라는 말도 나왔었다.

이러한 공간적 가치의식은 한국정치의 주도세력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고질적으로 한국은 지역을 중심으로 정치권이 나누어져 왔다. 대통령을 중심한 한국의 지도권 엘리트도 공간에 의해서 결정되어 왔다.

특히 군사정권이후로 경상도 출신들이 한국지배세력으로 등장해서 오랫동안 한국을 이끌어왔다. 소위 말하는 T K 혹은 대구 경북이라는 소집단의 세력이 한국을 지배한 때도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군사혁명이후 육사 8기생이라는 혁명주체 세력이 군사정권의 기틀을 놓기도 했다.

8기라는 동기의식을 가진 극히 작은 엘리트 그룹이었다.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역시 공간중심의 지도권은 부산 경남으로 옮겨갔고 김대중 대통령은 오랫동안 그늘에서 빛을 보지 못하던 호남중심의 지도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지난번 노무현 대통령의 선출은 이러한 ‘공간’ 중심의 한국의 지도적 세력이 ‘시간’중심의 지도세력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한국정치세력의 구심점이 어떤 특정한 지역이나 공간의 장벽을 헐었다고 하는 사실은 한국정치사에서 특기할만한 사건이다. 바로 이 점이 노무현 정권 출범이 가져다 준 매력과 약속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출범이 이러한 공간의 장벽을 헐 수 있었던 힘은 386이라고 특정지어지는 세대 때문이었다. 386은 어떤 지역이나 공간의 소속감에서 나온 산물이 아니고 시간적으로 같은 세대를 살고 있다는 시간적 소속감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공동체다. 공동체가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진 것이 아니고 시간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물론 4·19세대니 6·3세대니 하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이러한 4·19나 6·3세대는 같은 세대로서의 폭이 짧고 단일 사건을 중심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지속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386세대는 1980년의 광주항쟁 사건으로부터 받았던 충격적 경험을 계기로 그 동안 20년이 넘는 폭 넓은 공감대를 한 세대로서 경험 할 수 있었다는 점과 또한 이러한 한 세대로서 겪었던 공동의 경험이 지역이나 학벌까지도 초월한 광범위한 세대중심의 공동체를 창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특정한 소집단 엘리트가 아니라 한 세대 자체가 엘리트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은 한국이 경험했던 독특한 사회상황이나 정치적 환경 때문이었다. 군사정권의 연장, 구태의연한 한국의 정치 풍토, 그리고 기성세대의 보수적 가치관, 기성정치인들의 부패에 대한 혐오와 정치의 민주화와 사회정의, 부의 재분배, 민족적 숙원인 통일에 대한 염원과 민족적 자긍심을 찾기 위한 민족주의에 대한 갈구, 이러한 공감대가 386세대에게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세대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세대로서도 특정 지을 수 있다. 이 세대를 묶어준 공감대는 지역적 공간의 제한을 쉽게 초월해서 인터넷이 마련해주는 인공적 공간감이었고 이러한 인공적 공간을 나눔으로써 순간적으로나마 마치 자기들이 한 공간에 속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은 어디까지나 ‘cyberspace’이기 때문에 지속적 공간의식은 생기지 않는다.

386세대는 한국의 전통적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적 가치관에서 한 세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시간적 가치관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 세대중심의 지배세력이 다른 세대와 대화나 교류가 없이 독자적으로 지배적인 힘을 발휘할 때 지역중심의 지배세력이 가졌던 배타주의와 독선주의, 그리고 착각된 우월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노영찬 / 美 조지메이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