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들에게는 보리밥이 가난의 상징이었다. 요즘 와서 건강식이니 뭐니 해서 다시 보리밥이 약간 부상을 했지만 아직도 한국의 주식은 쌀이다. 요즘의 보리밥은 잡곡밥의 하나로 쌀과 섞어서 건강식 별미로 먹는 밥이다. 쌀이 없어서 꽁보리밥을 먹는 집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따져보면 우리역사 가운데서 ‘꽁보리밥’이니 ‘보릿고개’니 하는 말이 사라진 것은 최근의 현상이다.

역사적으로 보리밥은 한국민족의 가난 속에 깊이 뿌리박고 살아왔다. 옛날부터 부자·권력가·지주·양반은 쌀밥을 먹었고 상민·소작인·천민·노예들은 보리밥을 먹었다. 심지어는 집안에서도 아들아이는 쌀밥을 주어도 딸아이는 보리밥을 먹이는 성(性)차별도 있었다. 이렇게 보면 쌀밥과 보리밥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부자와 가난한자, 양반과 상민, 남자와 여자 즉 사회계급과 신분, 도시와 시골, 빈부와 남녀의 차별을 뚜렷이 해 주는 음식이었다. 일본식민지 통치하에서는 한국에서 생산된 쌀은 일본으로 가져가고 우리들은 보리밥을 먹었다. 해방 후, 그리고 특히 6·25를 겪은 세대들은 전쟁기간중 꽁보리밥에 날된장을 먹어 가면서 피란생활을 했다.

보리밥은 한국인의 고난의 상징이다. 고난은 상징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나간 고난을 수치로만 생각하여 숨겨서는 안 된다. 민족고난의 경험이 한 집단의 경험으로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승되기 위해서는 고난의 상징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고난의 상징적 행위를 되풀이함으로써 우리가 당했던 역사적 고난의 의미를 찾게 된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불행하게도 보리밥에 대한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당해온 고난의 의미와 상징도 잃어가고 있다. 요즘은 오히려 우리민족의 고난의 역사적 원인을 찾고 그 책임을 묻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민족의 ‘의식화’이다. 한국의 ‘의식화’ 과정은 국내적으로는 민주화 및 인권투쟁으로 나타났고 국제적으로는 민족주의의 모습을 보이면서 강대국, 특히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paranoia)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까지 한국을 보호해 주고 도와주었다고 믿어왔던 미국이 사실은 우리민족 고난의 원인으로 비난받아야 할 대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과 앞으로도 미국은 한반도의 자주와 안보에 위협의 대상으로 등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인의 국제적 ‘의식화’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한 바른 해석은 극단적으로 자기자신을 비난함으로써 만족을 느끼는 자학증에서도 벗어나야 하지만 또 한편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두려움으로 휩싸인 피해망상증으로부터도 벗어나야 한다.

고난의 원인은 외부적 원인과 내부적 원인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고난에 대한 해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고난에 대한 원인을 찾고 누구를 비난해야 할 것인지를 판명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고난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의미를 찾고 깨닫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여기서 고난을 내면화시키고 정신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정신화(spiritualization)의 단계가 필요하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고 전승하는데 성공한 민족이다. 그들은 해마다 유월절(Passover)이면 자기들이 이집트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나오면서 피란민으로서 먹던 마쪼(Matzoh·밀가루에 효소를 넣지 않고 구운 빵)를 먹으면서 자기조상들의 고난을 기억하고 이 고난의 기억을 차세대에게 설명해주고 물려주는 의미 있는 의식(儀式·ritual)을 행한다. 가족이 둘러앉아 음식을 같이 나눈다는 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서 민족적 고난의 의미를 내면화시키고 정신적인 차원으로 의식화(意識化)시키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우리도 이제 일년에 한번쯤은 보리밥의 날을 정해서 가족들이 모여 앉아 꽁보리밥과 날된장을 먹으면서 우리민족의 수난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보리밥의 날이 있어야 한다. 6월 25일이나 아니면 정전협정이 이루어진 7월 27일을 평화의 날과 동시에 보리밥의 날로 제정함도 생각해 봄직하다.

/ 美 조지메이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