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작가 박경리

한 월간지 기자가 원주에서 ‘작가 朴景利(박경리) 집’을 묻다가 ‘선생님을 함부로 호칭한다’고 그 동네 약방주인에게 푸대접을 받은 일화는 ‘토지’와 박경리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토지’는 1백30만부나 팔려나간 물량적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작품에 대한 평론집이 4권이나 발간 되고, ‘토지문화재단’을 설립(96년)시키기까지 한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작품이다.

하동 평사리(1부) 간도 용정촌(2부) 진주, 평사리, 지리산, 서울(3부) 평사리, 서울, 간도, 일본(4,5부)을 무대로 구한말에서 광복까지의 한국근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토지’는 69년부터 현대문학, 72년부터 문학사상, 78년부터 주부생활, 83년부터 경향신문, 92년부터 문화일보에 각각 연재해오면서 문학사상사, 삼성출판사, 지식산업사 등에서 부분적으로 발간되었다. 토지의 완간본은 94년 8월15일 전 5부 16권이 탈고됨에 따라 같은해 솔출판사에서 나왔다.

‘토지’를 집필해가던 작가는 두차례나 연재도중하차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83년 경향신문에 연재하던 제4부를 불과 5개월만에 돌연 중단하면서 ‘연재 도중 하차의 변’을 통해 소설이 되지 않는 데도 무리하게 소설로 끌고나가는 고충을 솔직하게 독자들에게 사과하여 그 글을 접한 이들을 숙연하게 했다.

‘토지’ 1, 2부를 읽고 나서 그 다음부터는 책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애욕과 음모, 살인과 반란, 약탈과 보복 등의 극적 요소들이 많이 등장하는 1, 2부에 비하면 일제하의 침체되고 좌절과 울분의 나날로 채워지는 진행이 지루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하일 솔로호프의 대하소설 ‘고요한 돈강’을 읽듯 1, 2부를 읽다가 3부에서부터는 제임스 조이스의 연작소설 ‘더블린 사람들’을 읽는 듯한 이질감 때문인 것 같다. ‘토지’의 등장인물 또는 2세들이 이 두 소설의 형식적 차이에 상응하는 사회적 분화를 거쳤고, 작가 또한 그에 대응한 형식을 구사했다면 그런 괴리감은 없을지도 모른다. 대한제국의 수립과 3.1운동 사이의 불과 20여년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지만 서구의 몇 세기에 해당하는 사회적 변화를, 그것도 식민지적 상황에서 겪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토지’는 수많은 인물들을 종횡무진 모자이크하는 방식이 도입되지만 가족사 내지 연대기적 성격을 고수했다. 작가 자신이 시대와 또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생이 토막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구체적인 것 하나하나를 유기적으로 엮어내려고 고투했고, 거기에 25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토지’는 소설로 쓴 한국 근대사라고 하지만 토착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산문집의 잠언같은 단문들이나 소설 속 인물들의 입을 빌려 나오는 철학적 인식은 냉전체제 붕괴 이후 무색해진 사회과학 이론에는 없는 지혜의 빛을 발한다. 그 힘은 작가 박경리의 당당한 삶의 태도, 생명사상 등에서 찾을 수있을 것이다.

“정신의 살해자, 그 몰이꾼들에게 쫓기는 한마리 사슴같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되는 겁니까 외치며 글을 썼다”. 분노와 고통과 비애가 글쓰는 행동으로 지탱되었다는 작가 박경리의 삶과 생각이 농축된 ‘토지’는 우리시대의 값진 스테디셀러이다.
<方大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