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뒤로가기
검색/메뉴
검색
메뉴
오피니언살며 생각하며

유리병 속에 담긴 마음

  • 입력 2024-06-21 11:39
댓글 0 폰트
은미희 작가

베란다 구석에 방치된 유리병
오랜 시간 재워진 작은 알갱이

작은아버지가 선물한 말벌술
오빠는 병약한 동생에게 양보

무엇을 누구와 나눈다는 것은
사회·세상에 지불해야 할 의무


이게 뭐지? 베란다 한쪽 구석에 버려지듯 방치된 유리병이 눈에 띄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유리병을 싸고 있는 에어캡이 그간의 시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뿌옇게 흐려져서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도대체 뭘까. 조심스럽게 그 유리병을 싸고 있는 비닐 뽁뽁이를 벗겨냈다. 내 손이 닿을 때마다 에어캡에 두껍게 내려와 있던 먼지들이 풀썩풀썩 흩날렸다.

도무지 유리병 속에 들어있는 진한 갈색 액체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비닐 포장을 벗겨내자 액체 속에 푹 잠긴 완두콩만 한 크기의 작은 알갱이들이 눈에 밟혔다. 간장이나 매실청인가 싶었는데 둘 다 아니었다. 오랜 시간 재워진 그 알갱이들은 시나브로 쪼그라들어서는 단박에 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뚜껑을 열어 보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어이 열려고 마음먹었으면 어떻게든 열었을 테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베란다에 있었던 걸 보면 당장 필요한 게 아닌 듯싶어 굳이 애써서 뚜껑 여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그 유리병 속의 물건이 무엇인지.

그것은 오래전, 아주 오래전, 작은아버님께서 오빠에게 주신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말벌을 재운 술이었다. 말벌의 독이 성체와 함께 고스란히 그 안에 녹아 있었다.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고, 옛날부터 중병에는 독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작은아버님은 어디서 말벌을 재운 술이 약이 된다는 말을 들으셨던 모양이다. 중등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하다 오래전에 정년퇴직하시고 건강과 소일 삼아 벌을 키우고 계시던 작은아버님이셨으니 벌과 꿀에 관한 한 웬만큼은 알고 계셨다. 그러니 약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십 년, 아니 이십 년도 더 지난 것이었다. 그만큼의 시간 동안 말벌은 유리병 속에 술과 함께 봉인돼서는 까맣게 잊어져 있다가 이제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는 그때 그랬다. 그 약술이 담긴 유리병을 동생에게 내밀면서. 작은아버님께서 주신 거다. 몸에 좋다니 조금씩, 아주 조금씩 먹어라. 작은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은 집안 장손이 걱정돼 직접 담근 말벌술을 오빠에게 주셨고, 오빠는 그걸 다시 동생에게 준 것이다. 자신이 먹어도 좋을 것을 다른 이를 위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건네는 그 마음과 온기가 따듯했다. 그때 동생 대신 받아든 유리병에서 오빠와 작은아버지의 마음이 묵직하게 전해졌다.

그 말벌은 작은아버지의 벌통을 공격하던 주변의 말벌들을 잡은 것이라고 했다. 장손을 줄 거라 위생에도 특히 주의했다고 하셨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지금이라도 먹어 볼래? 조금, 아주 조금만. 나는 작은아버지의 수고와 정성과 오빠의 마음을 생각하며 동생에게 물었다. 정말로 동생이 먹었으면 했다. 그걸 먹고 조금이라도 더 기운을 차렸으면 했다. 아직 한창 나이인데, 생의 대부분을 병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동생이 안타깝고 애잔했다. 오빠도 그 마음이었을 것이다.

싫어. 내 바람과는 달리 동생은 화들짝 놀라 손사래까지 치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처음부터 먹을 요량이었으면 이렇게까지 구석에 박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니가 먹어. 좋다잖아. 동생은 내게 먹으라고 권했다. 작은아버지에게서 오빠에게로, 오빠에게서 동생에게로, 이젠 동생에게서 나인가? 하지만 나 역시도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한 술도 뜨지 않은 채 처음 건네준 그대로 방치돼 있다는 걸 알면 오빠는 얼마나 서운할까. 그때 오빠는 그걸 먹으면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는 동생이 조금이라도 나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고, 그 기대감에 건네는 표정 또한 낫낫했다. 잘 챙겨 먹어. 뭐가 약이 될지 모르니까. 오빠는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런 물건이었으니 오빠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어려웠다. 술에 푹 재워진 그 알갱이들 사이에서 아직 온전히 제 형체를 간직하고 있는 날개들을 마주하다 보면 먹기가 쉽지 않았다. 알갱이는 거르고 술만 입에 적시듯 마시는 거였지만 말이다. 게다가 공산품이면 모를까, 집에서 만든 단방약이라 행여 먹고 탈이 날까 걱정도 됐다.

지나친 기우일지는 모르지만, 혹시 있을 뒷일이 염려스러운 것이 소셜네트워크에 올라오는 세상 잡다한 소식이나 뉴스들에 나도 모르게 학습이 된 모양이다. 비단 말벌을 재운 술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물건과 음식을 나누고 싶었지만, 번번이 마음을 접었다. 그저 모른 척 지나가면 내 지루한 일상은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방관자적 심리가 세상에 대한 나의 무관심을 부추겼다. 하지만 마음 한편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모두가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느라 방관자가 될 때, 세상에 대해 무관심해질 때, 그 사회는 더는 안전하지도 않고 나 자신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다.

내 것을 나눈다는 것. 그것은 일정 부분 자신이 속한 사회와 세상에 지불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기도 하다. 인류애! 그 사랑은 일종의 생존세이기도 하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는데, 정말 그것은,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이며 나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건강할 때 내 삶도 건강해진다. 나 혼자 건강한 삶은 오래가지 못한다. 생명은, 세상은 그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순환되는 것이다. 그 유리병은 애초의 주인에게 돌려보내야겠다. 오빠에게.

photo이미지 크게보기 은미희 작가

이 기사를 친구들과 공유해 보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안내 버튼

최근 12시간내
가장 많이 본 뉴스

문화일보 주요뉴스
<em class='label'>[속보]</em>MS발 전세계 IT 대란에 국내도 파장…일부 항공·게임 서버 ‘먹통’
[속보]MS발 전세계 IT 대란에 국내도 파장…일부 항공·게임 서버 ‘먹통’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클라우드 서비스에 장애가 발생하면서 일부 국적 저비용항공사(LCC)의 발권·예약 시스템과 국내 온라인 게임 서버가 먹통이 되는 등 국내에서도 피해가 현실화했다. 정보통신(IT) 당국은 MS 클라우드 기반 국내 정보기술 서비스에 끼칠 피해 여부를 예의주시하면서 상황을 파악 중이다. 19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이스타항공, 제주항공, 에어프레미아의 항공권 예약·발권 시스템에서 오류가 발생했다. 이들 3사가 사용하는 독일 아마데우스 자회사 나비테어(Navitaire) 시스템이 MS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기반으로 운영됨에 따라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현재 온오프라인을 통한 항공권 예약에 오류가 발생하고 있으며, 공항에서는 직원들이 직접 수기로 발권해 체크인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수속 대기 시간도 길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다만, 인천국제공항은 자체 구축 클라우드를 사용하고 있어 공항 운영에 지장을 받지 않고 있다. 공항 내 셀프 체크인 서비스 등도 정상 운영 중이다. 이번 사태로 국내에서 서비스 중인 일부 온라인 게임도 영향을 받았다.펄어비스 ‘검은사막’ 운영진은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통해 "갑작스러운 장비 이상으로 ‘검은사막’ 서버 불안정 현상이 발생했다"며 "사용 중인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전 세계 동시 장애로 확인되며 정상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펄어비스는 이에 따라 이날 오후 2시 30분부터 ‘검은사막’ 서버를 내리고 7시까지 긴급 점검에 들어갔다.게임업계에 따르면 MS가 엑스박스(XBOX) 콘솔과 PC 게임 패스를 통해 서비스하는 일부 게임도 이날 오전부터 서버 장애가 발생해 원활한 게임 이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전해졌다.반면, 쿠팡·G마켓·11번가 등 국내 이커머스 업계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업체는 MS 클라우드가 아닌 아마존웹서비스(AWS)를 기반으로 서비스가 운용된다. 통신 3사도 아직 MS의 클라우드 서비스 장애로 인한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정보통신(IT) 당국은 MS 클라우드 기반 국내 정보기술 서비스에 끼칠 피해 여부를 예의주시하면서 상황을 파악 중이다. 당국 관계자는 "속단하기 이르지만 해킹에 의한 피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과학기술정보통신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클라우드 서비스 이용은 아마존웹서비스(AWS) 비중이 60.2%로 가장 높다. 2위는 문제가 발생한 마이크로소프트 클라우드 애저로 24.0%를 차지한다. 곽선미 기
기사 댓글

본문 글자 크기를 조절하세요!

※ 아래 글자 크기 예시문을 확인하세요.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본인에 알맞은 글자 크기를 설정하세요.

닫기
좋은 기사는 친구들과 공유하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