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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살며 생각하며

나의 묘비석, 잘 살라는 명령

  • 입력 2024-05-2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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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 작가

“자신의 뿌리 모르면 안 된다”
조상묘 옮겨 한데 모은 ‘산일’
내가 묻힐 곳 묘비석 보면서

삶이 훨씬 더 두렵게 다가와
“가족묘원서 모임 이어가라”
당부에 살아갈 용기 더 생겨


며칠 전 집안에 산일(山役·산역)이 있었다. 작은아버님의 진두지휘 아래 기존 가족묘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을 한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수십 년 전에 이미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부모님과 증조부님의 산소를 한데 모아 가족묘원을 만들었었는데, 이번에 다시 파묘를 하고 새롭게 이장을 한 것이다.

이번 일을 하면서 작은아버님은 그러셨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지킬 것은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자신의 뿌리를 모르고 살면 안 된다고. 그러니 조상은 알고 지내야 한다고. 진즉 팔순을 넘긴 작은아버님은, 산일이 쉬운 일이 아니니 당신 생전에 꼭 마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더니 이번에 생전의 숙제 같은 일을 마치셨다. 산일을 하고 돌아오실 때 작은아버님의 표정은 낫낫하고 흡족하고 편안해 보였다. 쨍쨍한 햇볕에 붉게 그을린 얼굴이 오히려 생의 활기처럼 여겨졌다.

사실, 기존의 가족묘원은 잘 다듬어진 공원 같은 곳이었다. 여유 있게 공간을 확보해 터를 닦고 단을 만들어 위에서부터 증조부님과 조부님의 산소를 마련하고, 그 아랫단에 차례로 당신들이 묻힐 자리와 자식들이 들어갈 자리까지 조성해, 석곽에 봉분을 올린 가묘를 만들어 두었다. 집안 어른들의 노고 덕분에 사촌과 우리는 큰일을 당해도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한데 그 좋은 묘원을 놔두고 다른 곳으로 이장한다고 했을 때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요? 지금도 좋은데, 왜 굳이 산일을 다시 해야 하는데요? 그러나 다시 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고 했다.

재작년 추석 즈음에 올케가 전화를 걸어 왔다. “아가씨, 성묘를 갈 수가 없어요. 산소로 통하는 길이 막혔어요.” 올케의 음성이 울가망했다. 왜요? 나는 사정을 물었고, 올케는 저간의 일들을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가족묘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래 논과 연접한 길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길이 막혀 버렸다는 것이다. 집안 어른들이 나서서 그 논을 사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잘 안 됐고, 그런 연유로 그간에 산소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섭섭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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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다른 문제도 있었다. 요즘에는 화장하지 않으면 산일을 거부하는 터라 그 큰 석곽의 봉분도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니 아예 다른 곳으로 옮겨 봉분을 올리는 대신 아담한 평장으로 바꾸고, 나무를 더 심어 이전보다 더 쾌적한 공원으로 만들기로 했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집안 어른들은 사촌들이 얼굴도 모르고 지내는 요즘 세태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며 일 년에 한 번 그 가족묘원에서 집안 구성원이 전부 모이도록 했다. 6월 6일에 갖는 그 연례행사 덕분에 우리는 사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뭘 하고 사는지 잘 알고 있었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기꺼이 손을 내밀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진행된 산일이었다. 오월의 눈부신 햇살 속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주검들이 기이했고, 불안했다. 생명의 계절에 죽음의 기운이라니! 영면을 방해받은 주검들이 그 햇빛 속에서 몹시 불온해 보였다.

한데 이번에 새롭게 조성하는 가족묘원에는 내 자리까지 만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무언가 명치끝에 둔중한 동통이 일었다. 여전히 나는 죽어서도 부모님 곁을 떠나지 못하는 미성숙한 사람이구나, 싶어. 출가외인이라고, 결혼했으면 배우자를 따라갔을 텐데, 나는 그러지를 못하는 것이다.

나는 정을 맞은 듯 한자리에 우뚝 섰다. 이게 뭐지? 여러 묘비석 가운데 하나, 그 묘비석이 비수처럼 내 마음에 박혔다. 내 묘비였다. 세상에나! 살아서 보는 내 묘비석이 생경했고, 이상했다. 살아생전의 내가 사후의 나를 만난 것이다. 이름과 생몰연대, 행주은씨 37세손이라는 표기와 함께 몇 줄로 요약된 삶의 자취가 새겨져 있는 그 묘비명은 이게 너라고 항의하듯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묘비를 보노라니 살아온 수십 년의 삶이 마치 신기루 같았다. 살아 전전긍긍하고 애면글면했던 그 모든 애환과 통한과 환희가 마치 환상통인 것만 같았다. 하긴 희로애락애오욕, 오욕 칠정은 실체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죽고 나면 바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니 했는데, 죽어서도 이렇게 자리를 차지하고는 또 다른 흔적을 남기는구나 싶어 문득 사후의 일이 두려워졌다.

그 묘비석은 나에게 남은 생도 잘 살라는 명령처럼 들렸고, 또 주문처럼 다가왔다. 죽음은 한 존재의 종말이자 사멸이라 생각했는데 끝이 아니라니. 한 사람의 흔적은 어떤 식으로든 남게 마련인데, 그걸 간과했던 것이다. 한 존재는 죽음 이후에도 끊임없이 타인의 기억 속에서 소환되고 반추되면서 살아 있는 것이다. 기억은 타인의 몫이지만 그 기억의 서사를 제공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그러니 남게 될 기억을 위해서도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살아서보다 죽음 뒤의 시간이 훨씬 더 두렵게 다가오니 이제 죽음 뒤를 생각할 나이가 됐다.

돌아오는 길에 작은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쩌면 작은아버님이 남기는 마지막 당부일 것이다. “우리가 죽고 난 뒤에도 가족들이 모이는 연례행사만큼은 꼭 이어가라. 그것이 사람살이의 기본이다.” 죽어서 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곁에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다는 그 사실이 참 좋고 든든하다. 예상치 못한 감정이었다. 남은 생도 힘차게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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