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뒤로가기
검색/메뉴
검색
메뉴
방송·연예M 인터뷰

“가수로 번 돈은 나눔에 쓰며 보답 … 90살 돼도 노래하며 살고파”

박현수 기자
박현수 기자
  • 입력 2022-12-02 09:01
  • 수정 2022-12-22 16:36
댓글 폰트

이미지 크게보기 하춘화는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조선팰리스 24층 1914룸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90세까지 짱짱하게 노래하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히트곡을 남긴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강조했다. 문호남 기자



■ M 인터뷰 - 신영균재단 예술인 선행 대상 받은 가수 하춘화

‘봉사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 실천
누적 기부액 200억원 넘어

‘최장수 가수’ 기억되고 싶어
매일매일 연습해 자기관리
이달 서울 · 대구 · 부산 디너쇼

예술철학 등 학업도 열중
국내 가수 최초 박사학위
남편과 함께 주말엔 등산
평범한 결혼 생활에 행복


‘1년 입어도 10년 입은 것처럼 친근하고, 10년 입어도 새 옷처럼 느껴지는 옷.’
 
오래전 어느 유명 의류회사 홍보 카피다. 올해 데뷔 61주년을 맞은 ‘트로트의 여왕’ 하춘화를 보면 그 카피가 떠오르고, 늘 새 옷 같은 느낌이 든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절차탁마의 자세로 신인처럼 무대에 서는 그를 데뷔 연륜만 보고 70대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1961년 여섯 살의 나이에 데뷔한 그는 이제 ‘6학년 7반’이다. 다섯 살에 데뷔한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오랜 기간 세계 최연소 가수 데뷔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하춘화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조선팰리스 24층 1914룸에서 진행했다. 그와의 만남은 세 번째였다. 첫 만남은 1970년대 중반 초등학생 시절 경북 예천군에 있는 한 극장에서 열렸던 리사이틀 공연에서다. 당시 그의 나이 10대 후반으로 기자의 눈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큰 눈동자에 싱그러운 모습은 크게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는 지난 10월 20일 신영균예술문화재단에서 개최한 제12회 ‘아름다운예술인상’ 시상 행사에서다. 그는 이날 굿피플예술인 부문(선행상) 대상을 받았다. ‘일생을 두고 실천해온 기부활동은 대표적인 선행 예술인의 모범이 되고 있다’는 것이 수상자로 선정된 사유다. 지금까지 누적 기부액이 2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수상 소감이다.
 
“선행은 남모르게 해야 하는데, 잘한다고 상까지 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옛날 어르신들이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아버지 말씀을 잘 들으니 칭찬이 저에게로 온 것이라고 생각해요. 데뷔할 때부터 아버지께서 늘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살아라. 그게 가장 복된 삶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항상 머릿속에 그 말씀을 새기며 살았습니다. 이 상은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더 좋은 일을 많이 하라고 주신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래도 열심히 하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살겠습니다.”
 

이미지 크게보기 ‘기부 천사’ 하춘화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연예인으로서 수입을 내 돈으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 돈은 나누기 위해 쓰라고 하나님이 주신 돈”이라며 “쓰는 즐거움보다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는 기쁨이 훨씬 더 크고 뿌듯하게 느껴진다”고 강조하며 양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문호남 기자


하춘화는 이날 인터뷰에서 “연예인으로서 수입을 내 돈으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 돈은 나누기 위해 쓰라고 하나님이 주신 돈”이라며 “쓰는 즐거움 보다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는 기쁨이 훨씬 더 크고 뿌듯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부친(하종오)은 부산에서 손꼽히는 사업가였다. 하춘화의 타고난 재능을 일찌감치 발견한 부친은 부모의 역할은 자식의 재능을 살려주는 것으로 생각해 2019년 101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매니저를 하며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
 
“아버지가 늘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옆에서 든든하게 지켜주셨던 아버지가 지금도 보고 싶어요. 제 가요 얘기를 하면서 아버지를 빼놓고는 할 이야기가 없어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전국 곳곳에 있는 아버지의 발자취와 아버지와의 추억들이 남아 있어요. 아버지는 가수활동을 하면서 늘 모범이 되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사랑을 받았으면 어려운 사람에게 되돌려 줄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어요.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그런 교육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봐요.”
 
하춘화는 부친의 손에 이끌려 ‘효녀 심청이 되오리다’ 음반을 내고 데뷔했다. 1971년 16세 때 발표한 ‘물새 한 마리’가 히트하면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같은 해 고봉산과 듀엣으로 부른 ‘잘했군 잘했군’으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 가수상을 받았다. 10대 나이에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했다.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이 120장, 노래는 2500여 곡, 공연 횟수는 8500회로 1991년 세계기네스북에 최장 공연 부문으로 등재돼 있다. 지난 2011년 정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그는 노래와 함께 학업에도 열중해 공부하는 가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79년 경남대에 입학해 전문 학사를 취득한 후 1998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에 편입해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에는 동국대에서 공연예술 석사학위를, 2006년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사회 변동기의 대중가요와 대중정서의 상관성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대한민국 가수가 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결혼 생활은 행복한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요. 특별나지 않아요. 다른 부부들과 똑같아요. 일이 있으면 못 보기도 하고, 일이 없으면 둘이서 막걸리도 마시고 떡볶이 먹으러도 가요. 종로에 유명한 생선구이 집에 가기도 해요. 또 영화도 보고, 의견이 맞지 않으면 부부싸움도 하고 극히 평범한 생활을 해요. 주말에 시간이 되면 등산도 가요. 우리나라에서 높은 산이란 산은 다 올라가 봤어요. 남편도 등산을 좋아해요. 그래서 같이 다녀요.”
 
언니의 친구가 KBS PD였는데 그의 소개로 KBS 기획조정실에 근무하던 6살 연상의 현재 남편과 1995년 결혼했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노력하는 가수, 자기관리에 철저한 가수로 알려져 있다.
 
“연습이 가장 중요해요. 노력 없이는 절대로 롱런할 수가 없어요. 현재 50년 이상 가수 활동을 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피나는 노력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노력하지 않고 게으르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도태하게 돼 있어요. 몸이 건강해야 건강한 소리가 나오고, 머리가 살쪄야 감정도 풍부해 져요. 머리를 살찌우기 위해선 책과 신문을 많이 읽어야 해요. 16살세 때 ‘물새 한 마리’를 부르기 시작해 지금까지 수만 번을 불렀잖아요. 그래도 무대에 오르게 되면 그 노래를 또 연습해요. 처음 신곡을 발표하는 심정으로요. 연습 안 하고 무대에 올라가면 절대로 안 돼요. 제 사전에는 대충이란 없어요. 코로나19로 공연이 없었어도 연습을 매일 했어요. 매일 평균 한 시간, 많게는 3시간 정도 연습을 해요. 오늘 점심때도 어느 분과 식사를 했는데 제가 TV 나와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감동 받았대요.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목소리가 나오느냐’고요. 저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후배 가수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은.
 
“왜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느냐고 말로만 하지 말고 인정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해요. 나 스스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죠. 그렇지만 남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려면 피나는 노력 없인 안 돼요. 먹을 거 다 먹고, 잠잘 거 다 자고,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예요. 일할 때는 올인해야 돼요. 가수가 노래할 때 눈물을 흘릴 정도로 푹 빠져 버려야 해요. 그래야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거든요.”
 
―요즘 트로트가 국민에게 새롭게 사랑받고 있다. 최근 TV조선에서 ‘하춘화 가요제’도 열리고 있다. 감회가 어떤가.
 
“트로트가 지금 다시 사랑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요. 한국 사람이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만 먹다가 스테이크를 먹고, 다시 김치·된장찌개가 그리워진 거예요. 난 그런 현상이라고 봐요.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인간적으로 돌아가요. 우리가 코로나19에 갇혀서 우울증에 걸려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트로트 가요를 들으니까 위안이 된 거죠. 외국 음악이었다면 위안이 됐을까요? 김치·된장찌개에 끌리는 것처럼요. 그게 이번에 증명이 됐잖아요. 잘나갈 때는 저속하다고 외면하다가 세상이 어려워지니까 찾는 거예요. 우리가 힘들고 어려우면 고향 가서 부모님 뵙고 오면 없던 힘도 생기잖아요. 그와 같아요.”
 

이미지 크게보기 ‘리사이틀의 여왕’ 하춘화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치하시는 분들이 우리 국민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정치를 해 주셨으면 좋겠다”면서 “국민이 나라 걱정하지 않고 마음 놓고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문호남 기자


―앞으로 공연 계획은.
 
“지난해 연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60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했다가 코로나19로 취소했어요. 오는 7~8일 대구와 부산에서, 27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디너쇼를 준비하고 있어요. 2026년에는 데뷔 65주년 기념공연을 거창하게 하고 싶어요.”
 
―어떤 가수로 기억되고 싶은가.
 
“대한민국에서 히트곡을 가장 많이 남긴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가수에게 히트곡은 그 가수의 역사거든요. 그래서 찬란한 역사를 만들고 싶어요. 저는 그냥 오래 사는 건 바라지 않아요. 건강하게 내 할 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고 오래 살고 싶어요. 나의 바람은 90세까지 짱짱하게 노래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피나는 연습과 노력을 통해 최장수 가수로 기네스북에 오를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욕심이 많죠? 하하하.”
 
하춘화의 부친이 101세에 돌아가셨고, 현재 모친은 101세에 생존해 계시기 때문에 장수 DNA를 이어받아 그의 꿈은 충분히 이뤄질 것으로 보였다. 하춘화는 꿈을 이루고 나서 몸이 쇠약해지면 사전(死前)에 지인들을 초대해 장례파티를 열어 감사 인사를 드린 후 자신의 히트곡을 들으며 ‘안락사’ 등으로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하는 게 희망 사항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정치적인 얘기라서 조심스럽다며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정치는 잘 몰라요. 하지만 나라가 잘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노래로 어떡하면 국민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그것만 연구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단 한 가지, 누가 됐건 정치하시는 분들이 우리 국민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정치를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나훈아 씨도 그런 얘기를 했잖아요. ‘역대 왕이나 대통령 중에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고요. 맞는 말이잖아요.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다 민초들이 이 나라를 지켜왔어요.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아주 우수한 국민이에요. 이 와중에도 한국 가요와 영화가 세계를 휩쓸고 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정치만 잘해 주면 국민은 각 분야에서 더욱 잘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제발 국민이 나라 걱정하지 않고 마음 놓고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게 해 달라는 거예요.”
 

이미지 크게보기 1970년대 고 이주일과 쇼 공연 무대에서. 하춘화 제공


■ 하춘화의 특별한 인연
 
하춘화를 얘기하면서 코미디언 고 이주일(본명 정주일·전 통일국민당 국회의원)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연은 1977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무명이었던 이주일은 ‘하춘화 쇼단’에서 진행을 맡고 있었다. 전북 이리시(현재 익산시)에서 공연을 하는 도중, 인근 이리역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났다. 이때 극장이 무너져내려 하춘화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10여 명이 사망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그날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해 업고 병원까지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생전 이주일은 한 방송에서 그 당시를 회상하며 “우리 하춘화 씨는 참 좋은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인정을 베풀고, 특히 부모에게 효도한다. 그리고 참 검소한 사람이다. 또 대단히 노력하는 가수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했다.
 
하춘화는 지난달 28일 인터뷰에서 “이주일 씨는 가족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가까운 분이었다. 8500회 공연 중 7000회 이상을 함께했다.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만약 살아계셨더라면 저랑 함께 공연, 사회봉사 등 더 좋은 일을 많이 했을 텐데 너무 그립다”며 아쉬움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주일은 하춘화 부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제가 나중에 인기를 얻어 유명해지면 꼭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가며 살겠다”. 결국 이주일은 이 약속을 지켰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이주일은 2002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춘화는 지난 6월 별세한 송해 선생과도 각별한 관계다. “선생님과는 돌아 가신 날 열흘 후에 같이 식사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는데 많이 아쉬워요. 2년 전 생신날 파티를 해드려 그나마 위안이 돼요. 목포서 홍어를 공수해 대접해드렸어요. 남은 홍어를 종로 사무실에 계신 분들과 파티 한 번 더 하시라고 하니까 엄청 좋아하셨어요.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게 선생님에겐 한이 됐지요. 그래서 술도 많이 드셨어요. 그것만 아니었으면 복된 삶을 더 사셨을텐데…. 코로나19만 아니었으면 100세까지는 사셨을 거에요. 전국노래자랑 하러 지방 다니시는 게 선생님에겐 대단한 운동이셨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중단돼 무척 힘들어 하셨어요. 모든 연예인들의 롤모델이었지요.”

박현수 기자 phs2000@munhwa.com

이 기사를 친구들과 공유해 보세요.

문화일보 주요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
안내 버튼

최근 12시간내
가장 많이 본 뉴스

기사 댓글

본문 글자 크기를 조절하세요!

※ 아래 글자 크기 예시문을 확인하세요.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본인에 알맞은 글자 크기를 설정하세요.

닫기
좋은 기사는 친구들과 공유하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