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생명의 노래-고고성, 혼합재료에 먹과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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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종의 시화기행 - (111) 시뇨리아 광장의 사보나롤라

메디치 가문·교황청의 부패 공격
도덕 재무장·영적 각성 운동 주도
새로운 기독교 공화국 설립 역설

책 태우는 등 ‘피렌체판 분서갱유’
거장들 예술품엔 온건주의적 태도

시민들 집단적 열망·최면 걷히며
광장서 십자가 매달려 화형 당해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이 지척인 피렌체의 아고라(Agora)다.

한낮인데도 하늘에는 눈썹 같은 초승달이 걸려 있다. 사람들이 오가는 이 안온한 광장이 한때는 광기와 살의의 현장이었음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왜 발소리도 내지 않고 걷던 걸음들이 광장에만 모이면 흥분해 지축을 흔드는 것일까. 광기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일까. 왜 충동의 에너지들로 들끓게 되는 것일까. 우리만이 정의라고 믿게 하는 광장. 다수의 물결이 개인의 고독과 소외를 일거에 지워버리는 광장. 진실로 광장의 매직이다.

‘시뇨리아’는 원래 ‘통치자’라는 뜻. 그러나 광장을 통치하는 자는 왕왕 그 희생자가 된다. 광장의 역설이다. 호산나, 예수는 구세주라고 찬양하던 군중이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치던 곳도 빌라도의 광장이었다. 시뇨리아 광장에서도 그 광기와 흥분의 여진이 느껴진다. 그 옛날 세계사 시험문제에 가끔 나왔던 문제적 인물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광장의 조각상 중 ‘메두사의 목을 든 페르세우스’라는 작품을 보면서 불현듯 이 광장에서 화형당했던 그 이름이 떠올랐다. 한때는 피렌체 시민의 유일한 위안이었고 희망이었던 그 이름이 집단적 광기와 증오를 불러오는 표적이 되기까지는 불과 4년의 세월이 흘렀을 뿐이다.

철옹성 같은 메디치 가문의 지배력 속에서 이 이방인은 군대도, 칼도 없이 어떻게 도시의 수장이 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굉음을 내며 연일 무너져가던 당대의 메디치와 피렌체의 문명지도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광장에는 메디치를 부흥시켰던 코시모 1세의 위풍당당한 청동기마상이 서 있다. 그의 후예는 위대한 자 로렌초. 43세에 죽었지만 그 위대한 자의 생애는 숨 가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조반니 보카치오 같은 예술가들을 전폭적으로 후원했고 마르코의 자기 정원에는 조각 학교까지 열었다. 15세 소년을 데려와 그 조각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하고 아들처럼 돌봤는데, 그가 미켈란젤로였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 가운데서도 피렌체를 가장 융성하게 만들면서 르네상스를 주도해갔다. 그러나 그의 죽음 후 피렌체 통치를 위임받은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는 유약했다. 약하면 밟히는 법. 프랑스가 침공해왔다. 이런 날을 예언했던 사보나롤라는 광야의 요한처럼 외쳤다. 회개하라! 지옥이 입을 벌리고 있다. 로렌초의 임종 자리에 있었던 수도사 사보나롤라는 피렌체가 부도덕과 부패를 몰아내고 새로운 기독교 공화국을 세우지 않으면 결국 지옥의 불 속에 집어던져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적 설교를 했다. 원래 로렌초와도 가까웠던 그는 로렌초 사후 정면으로 메디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메디치 가문의 붕괴와 함께.

피렌체인의 자긍심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치 쓰나미처럼 불안과 불만의 기류가 부풀어 올랐다. 사보나롤라는 메디치 가문의 부패와 교황청의 부도덕을 함께 공격했다. 그와 함께 시민들로 하여금 집 안에 있는 모든 부도덕한 물건들을 광장에 가지고 나오도록 했고 불살랐다. 도덕재무장과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서적과 악기, 예술품, 심지어 향신료 같은 것들이 불살라졌다. 영적 고양에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불살라져야 했다. 예컨대 피렌체판 분서갱유였다. 불안한 피에로, 무능한 피에로가 이끄는 집권 세력 대신에 시민들은 이 당돌하고 단호한 예언자에게 열광했다. 모든 술집이 문을 닫았고 경건과 자숙 모드로 돌입했다. 프랑스의 침공 같은 굴욕의 날이 도래한 것도 메디치 가문과 교황의 도덕적 타락과 부당한 부의 축적이 가져온 결과였고 이를 방관하거나 추종했던 시민들도 그 책임을 비켜 갈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화가·가천대 석좌교수

여기서 한 호흡 쉬면서 사보나롤라의 미학적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메디치 가문이 일으킨 문예부흥, 그중에서도 거장들의 창작품에 대해서만은 극단적 태도를 유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몸이 아름다운 것은 그 몸이 영혼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되 예술가는 거기에 각자의 표현을 더할 수 있다” “모든 시가 꼭 운율을 맞출 필요는 없다”와 같은 온건주의적 관점을 지닌 것이다. 사보나롤라의 ‘미론(美論)’은 그래서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 부도덕 물품을 불태우도록 했지만 그렇다고 반(半)나신의 조각상이나 성물(聖物)까지는 아니었다. 예술에 있어서만은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구분짓기가 애매해서였을까. 사실 그에게는 영성과 예술성에 대한 깊은 이해 같은 것이 있었다. 교황청이나 메디치 가문에서 예술품 장식에 지나치게 돈을 많이 쓴다고 공격은 했지만 좋은 예술이 신성(神性)에 다가가는 한 방편이라는 믿음 자체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술집을 문 닫고 금식과 기도의 나날을 계속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시민들은 차츰 그가 제시한 고통스러운 이분법에 지쳐갔다. 비록 자발적 의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삶에 들어오는 불결한 측면과 스며드는 죄성(罪性)을 완전히 박멸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이야말로 그 사실을 직시케 하는 것이다. 인간이 온전히 깨끗하고 성화된 상태라면 창조주는 굳이 그 아들에게 골고다의 고통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서서히 성화(聖化)와 성인(聖人)에 대한 집단적 열망과 최면 현상이 걷히면서 선지자는 공격의 대상이 된다. 노회한 교황 알렉산드로 6세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종교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고 성난 군중에 의해 결국 사보나롤라는 광장의 장작더미 위에서 십자가의 틀을 진 채 세워지게 된다. 그 좌우에는 예수처럼 제자 두 사람도 십자가에 달린 상태였다. 광장의 불길은 하늘로 치솟았고 사보나롤라와 두 제자를 그 불길의 혀가 삼켜 갔다. 심판의 날과 지옥의 불길이 임박했다고 외치던 그는 그렇게 에워싼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가 돼버렸다.

그 역사적 사실일랑 아랑곳없이 관광객들은 분주히 오가며 사진을 찍는다. 활기 넘치는 광장. 피의 흔적 같은 것은 없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눈 부시다.

화가·가천대 석좌교수


■ 사보나롤라는 누구

‘하나님이 보낸 使者’로 자칭… 파문 당한 뒤에도 선동 지속

도미니쿠스회의 수도사이자 설교자. 1494년부터 4년간 피렌체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메디치 가문과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을 공격하며 시민의 호응을 받아 집권했다. 1497년 교황청에 의해 파문당했지만 선동적 설교를 계속했다. 교회의 세속화와 비윤리, 성직매매, 부의 축적과 함께 메디치 가문의 무능과 부도덕을 공격하며 새로운 기독교 공화국 설립을 역설했다. 자신을 하나님이 보낸 사자라고 주장하며 ‘불의 시험’을 시도했지만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체포돼 광장에서 화형식으로 처형됐다.

이미지 크게보기 사보나롤라의 초상화, 모레토 다 브레시아, 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