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모자 쓴 여인, 22x28 ㎝. 혼합재료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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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종의 시화기행 - (106) 밀라노, 두오모 성당과 명품 매장

로마의 밤공기가 음산했다면
밀라노는 반짝이는 허영 같아

다빈치 같은 거장의 그림이
창조적 패션의 영감 이끌어
伊 명품 ‘구찌’ ‘베르사체’ 등
세상의 아름다움 태동시켜

로마를 떠나 밀라노로 왔다. 밀라노는 빛의 기둥으로 세운 도시 같다. 광장의 한가운데에 얼음처럼 서 있는 두오모 대성당 때문일 수도 있겠다. 떠나온 도시를 험담하기는 안 됐지만 그동안 머물렀던 로마는 사실 좀 음산했다. 밤에 걷다 보면 콜로세움에서 죽어간 넋의 알갱이가 차디찬 공기에 섞여 부딪혀 오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아마 지나치게 어두운 거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한다면 도시 전체가 낮에는 박물관, 밤에는 무덤이었다. 그에 반해 밀라노는 대책 없는 생기와 발랄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밤의 거리 또한 풍성한 빛으로 유감없이 부풀어 올랐다. 물론 로마의 밤공기에서 음산한 냉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면 밀라노의 그것 속에도 반짝이는 허영 같은 것은 있었다. 그러나 일단 환한 빛은 내게 은총이었다. 그만큼 어둑한 로마의 밤거리는 울퉁불퉁한 바닥에 불빛마저 인색하여 불편했다. 하지만 시간 산책자가 되어 걸어본 두 도시는 다른 듯 같게 엇갈리며 기묘하게 만나는 지점이 있었다. 두 도시 모두 문명의 ‘메멘토 모리’ 즉, 모든 시작에 대한 종말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장중하고 화려하게 출발한 문명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소멸과 죽음이다. 이를 견뎌내려 내세우는 것이 권력이고 아름다움이겠지만 무자비한 시간 앞에는 이 또한 속절없다. 권력을 향한 검(劍)은 순간의 섬광에 지나지 않고 아름다움 또한 흰 눈처럼 소멸한다. 그 덧없음에 대한 도피처가 있긴 한 것일까. 있고 말고다. 종교다. 그것은 인간의 시간을 버리고 신의 시간으로 갈아타려는 시도이다. 하얀 얼음덩어리로 떠 있는 것 같은 두오모 대성당 곁에 바짝 붙어선 명품 거리는 그래서 순간의 반짝임을 영원의 빛 속에 스미게 하려는 영리한 시도일 수도 있겠다. 성(聖)과 속(俗)의 기막힌 어울림이었으니까.

이미지 크게보기 지난해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시사회에 참석한 레이디 가가. 구찌 후계자 마우리치오의 전 부인 파트리치아 역을 맡았다. AP연합뉴스

나는 가끔 누구도 알 리 없는 나만의 여행이 지닌 그 확장성에 홀로 겨워한다. 낯선 지도 위를 걸으면서 차창의 공기처럼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평생으로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순간의 느낌들. 고유한 원초적 생명체로 서 있는 것 같은 자아와 그것을 둘러싼 행복한 흥분. 세계관과 시야가 넓어지며 알을 깨고 나오는 것 같은 그 황홀과 공포.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밤과 새벽의 시간들. 힘들게 돌아와 다시 가방을 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낮 동안 눈으로 보고 손으로 쓰다듬었다가 홀로 기록하는 시간의 그 고요한 황홀이라니. 그런데 방정맞게도 나는 대성당이 선 두오모 광장 쪽에서 환한 빛을 토해내는 명품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 쪽을 바라보며, 로마에서와 같은 음산하고 불길한 한 조각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본다. 무엇일까. 한사코 아름다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그 그림자 같은 것은.

머릿속으로 오래전 패션 이론가 넬리 여사의 초청 강연에서 들은 한 구절이 지나간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밀라노에서부터 길을 나선다. 더 좁게 말한다면 밀라노 직물 시장에서. 그 위로 내가 추천사를 썼던 한스 로크마커의 글도 지나간다. 지나친 아름다움을 경계하라, 욕망 곁에는 늘 죽음이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얼마 전 명장 리들리 스콧이 오랜만에 새로 만들었대서 화제가 된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의 소개 글과 짧은 영상 역시 함께 떠오른다. 이탈리아의 가죽장인으로 출발하여 패션 제국을 일으킨 구찌가에서 어느 날 들려온 한 발의 총성. 그것은 구찌의 후계자 마우리치오와 이혼한 아내 파트리치아가 전 남편을 향해 발사한 것이었다. 스콧의 ‘글래디에이터’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바 있던 의상 디자이너 잔티 에이츠는 이 영화에서도 색채와 죽음의 메타포를 보여주고 있다. ‘글래디에이터’의 우중충한 암갈색이 로마의 색이었다면 ‘하우스 오브 구찌’의 선혈 같은 붉은색은 밀라노의 상징색이라고 할 만했다.

각각 장엄과 황홀을 연출한 두 색은 역시나 허무와 죽음의 교차로에서 만난다는 점에서 어김없다. 그런 점에서 마우리치오의 맞춤 슈트와 코모두스 황제의 자줏빛 벨벳 망토는 절묘하게 맞는다. 두오모 광장에서 명품거리를 바라보자니 연이어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 하나가 떠오른다. 또 다른 패션 왕조 잔니 베르사체에 관한 것. 이탈리아의 화려한 예술과 건축과 역사를 현대 패션으로 부활시킨 베르사체의 로고는 ‘메두사의 머리’이다. 화가 카라바조는 같은 제목으로 수십 마리의 뱀이 한 남자의 머리를 감고 있는 강렬한 그림을 그렸는데 베르사체는 그 신화 속의 괴물을 패션의 로고로 쓴 것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었을 뿐 아니라 베르사체와도 악수한 셈이었다. 그는 황제가 되고 싶고 황후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극한 화려함의 황금빛 옷을 입혔고 거기에 메두사의 로고를 왕관처럼 씌워주었다. 어릴 때 집 근처 유적지에서 여동생과 놀다가 우연히 보았다는 그 형상의 악마적 탐미성에 평생을 사로잡혔던 셈이다. 밀라노에서 처음 그 재능을 선보이며 이탈리아를 패션 종주국에 확고하게 올려놓았던 베르사체 역시 1997년 아침 마이애미의 집 앞에서 앤드루 커내넌이라는 청년으로부터 저격당해 죽는다. 역시 극한의 아름다움 곁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지난해 이탈리아 밀라노 패션위크에 선보인 돌체앤가바나 S/S 컬렉션. 연합뉴스

어쨌거나 밀라노는 누가 뭐래도 세계 패션의 태자리이다. 파리나 뉴욕 패션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밀라노에서 만나게 되어있다. 패션은 아름다움의 꽃이다. 이 작은 도시는 어떻게 그 꽃을 만발하게 피워내며 세계로 내보낼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답을 베르사체가 했던 것처럼 고전과 역사의 상상력 속에서 찾는다. 잔니 베르사체가 메두사의 머리에서 베르사체의 창조적 발상을 얻었듯이 밀라노 패션은 두오모 대성당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코르소 마젠타의 유서 깊은 거리와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와 거장들의 그림에서 영감을 끌어내었다. 예컨대 ‘역사는 저 멀리 나는 여기 홀로’가 아닌,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줄로 엮이며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가늠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은 만난 적 없는 ‘그들’이 입었던 치렁치렁한 의상과 착용한 장신구들에서 문화와 예술과 권력과 돈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독 밀라노에서 과거는 멈춰버린 것이 아닌 미래로 가는 정거장이었다. 이쯤에서 알게 된다. 밀라노 대성당이 왜 한적한 곳이 아닌 명품 거리에 있는 것인지, 번쩍이는 광휘의 패션거리가 한사코 고요하고 장엄한 성소(聖所)의 곁을 고집하는지. 사라진 옛 밀라노의 한 조각이 오늘 내가 서 있는 땅과 퍼즐처럼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 밀라노·코모·플라토

이탈리아 명품브랜드의 본산… 파리·뉴욕 패션이 출발한 곳

밀라노에는 두오모 광장 근처의 백화점을 중심으로 다양한 명품 매장이 들어서 있다. 오늘날 중국 상권이 값싼 인력을 앞세워 장악하고 있다시피 한 북부도시 플라토는 섬유산업의 전통이 깊은 곳으로 밀라노의 명품 매장들과 연결되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독 플라토와 밀라노에서 급속히 번진 것도 이런 산업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밀라노로부터 1시간 거리에 있는 스위스 국경과 인접한 북부 호수마을 코모(Lake Como)는 베르사체와 페라가모 패션쇼가 매년 열리고 있고 이탈리아 실크 산업의 중심이어서 샤넬, 에르메스, 구찌 등의 일부 제품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이 세 도시를 축으로 하여 밀라노의 패션 산업은 세계로 뻗어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