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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합니다 - 어머니 정영자 님

김장의 계절이다. 김장 날은 대개 어머니 생신날과 겹친다. 내가 자라는 동안,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느라 어머니 생신상은 구경도 못 했다. 할아버지 제삿날과 어머니 생신날이 하루 차이여서 숙부, 고모 등 일가를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어머니는 당시로는 늦은 스물세 살에 남도의 두메산골로 시집오면서 고생길에 들어섰다. 2남 4녀 중 장남의 배필로 시집와 보니 시동생이 초등학교 3학년, 막내 시누이가 네 살이었다. 곧 큰아들인 내가 태어났으니 아이들 건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진 땅이 많진 않았어도 결혼 전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농사일에다 집안일로 하루해가 짧았다.결혼하면 바로 도시로 나간다고 약속했던 아버지는 입대 영장이 나오는 바람에 강원도 최전방으로 떠났다. 일할 때면 갓난아이를 끈으로 방 안에 묶어놓고 들판에 나갔다고 한다. 얼마나 원망스러운 세월이었을까.

3년의 군 생활 후 돌아온 아버지는 교육대학을 다니느라 다시 광역시로 떠났다. 그렇게 서른 살이 다 돼서야 아버지가 교사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겨우 시골 생활을 벗어났다. 산골에서 읍내를 거쳐 광역시로 나가 자리를 잡자 이제는 고모네 자식들 뒷바라지가 시작됐다. 큰집 장남에다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아버지 성품 때문인지 우리 집에서 신세를 지려는 고모네 자식들이 줄을 이었다. 비좁은 집에는 학생들이 넘쳐났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도시락을 열 개도 넘게 싸야 했다. 집안 제사, 행사를 챙기는 것도 모두 어머니 몫이었다. 그 와중에 노환으로 거동을 못 하고 몇 년을 누워계신 시어머니 간병까지 했다.

인고의 세월, 어머니는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평생을 남을 위해, 식구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셨다. 어머니는 남에게 부담 주고 폐 끼치는 걸 무척 싫어하신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다. 지금도 3남매 자식들 집에 오셔서 주무시는 일은 드물다. 번듯한 해외여행 한번 보내드리지 못한 자식들은 늘 송구하다. 두 분이 칠순을 맞으신 해 겨울에 부산 해운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 모습만이 눈에 선하다.

지금도 멀리 있어 자주 찾아뵙지 못해 미안해하는 큰아들에게 어머니는 “너희들끼리 잘 살면 나는 됐다. 바쁠 텐데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다. 자식 세대엔 절대 고생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디서 온 걸까. 집안 제사도 확 줄였다. 2011년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 제사도 간소화했다. 자식들은 고향에 들르는 기회가 있을 때 성묘로 대신한다.

올해도 가족들이 고향 집에 모여 김장을 한다. 어머니는 여든이 넘으셨는데 자식들 만류를 마다하고 아직도 밭에서 직접 채소를 가꾸신다. 올해도 우리 가족은 어머니 정성이 담긴 싱싱한 배추와 갖은 양념이 어우러진 맛깔스러운 김치를 맛볼 것이다. 20년 전 혼자 영국에서 연수를 하던 큰아들이 이역만리에서 배달받아 먹었던 어머니의 그 김치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혜가 담긴 맛이다.

어머니, 이제 일은 좀 내려두고 편히 쉬세요. 어머니가 건강하신 게 우리 가족에게는 제일 큰 복이니까요. 어머니 마음 늘 소중하게 되새기고 있습니다. 어머니 생신, 지면으로 먼저 축하드립니다. 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저희와 오래 함께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큰아들 성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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