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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일기자의 여행]

260년 前 역병 피해 모여든 이들… 산속 절집서 깨우친 ‘연대와 돌봄’

박경일 기자 | 2021-01-14 11:04

공덕산 자락에 아슬아슬 벼랑을 이룬 너럭바위에 올라앉은 사불암(四佛巖). 사방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비단에 싸여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사불암 너머 저 아래로 암자 윤필암이 내려다보인다. 윤필암에는 불상 대신 유리창 밖으로 올려다보이는 사불암을 모신 법당 사불전이 있다. 공덕산 자락에 아슬아슬 벼랑을 이룬 너럭바위에 올라앉은 사불암(四佛巖). 사방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비단에 싸여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사불암 너머 저 아래로 암자 윤필암이 내려다보인다. 윤필암에는 불상 대신 유리창 밖으로 올려다보이는 사불암을 모신 법당 사불전이 있다.


■ 조선시대 ‘감염병 극복’ 지혜 찾아 떠난 문경

1755년 12월 감염병 창궐때
양반들은 외딴집서 자가격리
평민·천민들은 산속으로 떠나
대승사 스님들 죽·잠자리 내줘

공덕산 해발 600m 바위 위엔
네 부처 새겨진 ‘사불암’ 우뚝
하늘서 떨어졌다는 설화 전해

현세와 내세 잇는다는 ‘하늘재’
그 길 수호하는 산신각 복원돼
현세 상징 관음리의 반가상엔
돌림병 퇴치한 이야기 깃들어

성철스님 대중과 만난 ‘김룡사’
절 감싼 숲선 마음 내려놓게돼
감탄 자아내는 대하리 ‘반송’도


감염병은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체계적인 격리원칙이나 방역수칙이 있고, 치료제나 백신에 대한 기대라도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어디 그랬겠습니까. 세균과 바이러스 관련 지식이 없었던 왕조시대에 감염병은 속수무책 떼죽음을 당하는 재앙이었지요. 감염병과 더불어 배척과 차별의 고통도 컸을 겁니다. 모르긴 해도 신분제의 시대였으니 지금보다 차별은 훨씬 더 극단적이었겠지요. 경북 문경의 유서 깊은 절집 대승사에는 감염병이 창궐하던 시기를 연대(連帶)로 건너간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산속의 절집이 감염병을 피해 산으로 숨어든 이들을 품고 가진 것을 나눠 먹었던 이야기입니다. 기록은 전직 관료가 일기에 적어둔 두세 줄이 전부지만, 그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느껴졌던 건 지금 우리의 처지와 비슷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문경에는 또 넘어진 석불을 일으켜 세워 돌림병을 퇴치한 이야기도 전해지고, 수백 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 마루에 다시 지어진 산신각 이야기도 있습니다. 신년의 간절한 소원을 생각하며 경북 문경 땅을 찾아갔던 이유입니다.


# 신념으로 택한 낮은 곳의 삶

경북 문경으로 향하기 전에 조선 시대 불교 이야기부터 하고 넘어가자.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 시대에 승려, 곧 스님은 이른바 ‘8대 천민’ 중 하나였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불교가 합당한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 것(출세간·出世間)’을 지향하는 데다 허무주의적이라며 비난했다. 대표적인 이가 조선 왕조를 설계하면서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꿈꿨던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그의 책 ‘불씨잡변’에서 석가모니를 일러 “왕이 되길 사양하고, 아버지를 잇지 않고, 부인을 버렸다”며 “이로써 군신, 부자, 부부의 인륜을 버렸다”고 힐난했다. 인륜을 지키지 않고 백성 살림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군대에도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님을 일러 ‘나라의 큰 좀’이라고까지 했다. 한발 더 나아가 부처를 ‘오랑캐’로 지칭하며 ‘미개한 족속’이라고까지 한 신진사대부도 있었다.

절집에 대한 권리와 대접은 이렇듯 형편없었으나 조선 시대 스님이 짊어진 의무는 혹독했다. 궁궐을 짓거나 성을 쌓는 등의 나랏일에 동원됐고, 양반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양반집 정자를 짓거나, 묘소의 석물을 나르는 일을 했고, 양반집 부엌살림을 위해 송홧가루나 산나물을 채취하고, 메주와 누룩을 만드는 일도 했다. 유람하는 양반의 가마를 죽을 힘을 다해 메야 했고, 행락 내내 여행가이드 겸 조롱거리가 돼야 했다. 가장 고됐던 건 절집이 도맡다시피 한 ‘종이 부역’이었다. 할당된 종이 납품량을 채우기 위해 혹한 속에서 찬물에 손을 담그고 종이를 떠내야 했다. 그게 얼마나 힘든 노역이었는지는, 종이 부역을 시작하면 절집 스님 절반 이상이 도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런 줄 뻔히 알면서도 왜 절집으로 출가해 스님이 됐던 것일까. 오갈 데 없는 신세로 절에 들어온 경우도 적잖았겠지만, 출가와 동시에 당장 공사장의 고된 일에 투입되고 양반을 태운 상여를 메고 산을 오르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한 선택이었다면 보통의 결심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도주와 피신의 목적으로 출가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종교적 신념’ 말고는 천민으로의 강등을 감수하며 그들이 머리를 깎고 수계를 받은 이유를 따로 설명할 방도가 없다.


# 창궐하는 감염병을 연대로 건넌 기록

왕실이 뒤로는 절을 짓거나 후원하고 거액을 시주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개인 신앙의 차원일 따름이었다. 사대부들은 노골적으로 불교를 멸시했다. 그럼에도 사찰이 살아남았던 건 평민과 천민들의 덕이었다. 불교를 탄압하든 말든, 이들은 꾸준히 절에 들러 시주하고 소원을 빌었다. 사찰이 현세구복의 민간신앙과 결합하면서, 평민과 천민들은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나 가장 곤궁할 때 사찰을 찾았다.

경북 문경의 유서 깊은 절집 대승사를 찾아갔던 건, 지금처럼 모두 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에 감염병의 위협과 공포, 그에 따른 극도의 생활고로 시달리던 평민과 천민들을 기꺼이 거두었던 이야기가 그곳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260여 년 전. 경북 문경 일대에 감염병이 창궐했다. 방역수칙도 없고 백신도 없었던 그때 감염병이 한 번 발생하면 전국으로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예나 지금이나 감염병 확산의 가장 큰 피해자는 가난한 이들이었다. 당시 감염병을 피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피접(避接), 즉 피해서 도망가는 것이었다. 감염병이 창궐하면 벼슬아치들이나 양반들은 부리던 노비의 외딴집을 마치 제집처럼 빼앗아 쓰면서 자발적 격리를 했다. 권세깨나 있는 양반들이야 갈 곳이 많았겠지만, ‘없는 사람’들은 마땅한 격리 공간이 없었다. 감염병이 돌면 평민이나 천민이 접촉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갔던 건 그래서다.

1755년 12월 24일. 감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던 날의 기록이 있다. 울산부사를 지낸 권상일이 남긴 ‘청대일기(淸臺日記)’에 그날의 기록이 남겨져 있다. 권상일은 청대일기에서 문경에 있는 대승사에 감염병을 피해 신분 낮은 이는 물론이고 양반까지 모여들었다고 적었다. 대승사의 스님들은 이들을 각박하게 내치지 않고, 없는 살림에도 죽을 끓여서 나눠 먹었다. 권상일은 대승사에 다녀온 동네 사람의 입을 빌려 “대승사 중들이 두세 동이의 죽을 끓여서 각각 한 국자씩만 주었는데 턱없이 부족했다”고 썼다. 어찌 감염병을 피해 온 이들뿐이었을까. 마침 흉년이어서 먹고살기 어려워진 거지들까지도 절집으로 찾아들었을 것이었다. 청대일기에 대승사 이야기는 고작 두어 줄에 불과하다. 누가 국자를 들어 나눴으며 어떻게 먹을거리를 조달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 몇 줄의 기록이 배척과 차별을 강요하는 감염병의 시대를 대승사가 공동체의 연대와 돌봄으로 넘어갔음을 전한다.


# 하늘에서 부처가, 땅에서는 연꽃이

대승사는 성철스님이 3년간 눕지 않고 수행하는 이른바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용맹정진했던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법전스님은 이곳에서 밥 한 덩이와 김치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며 정진하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자취와 흔적이 없기는 이 또한 마찬가지다. 대승사에는 시대를 건너가는 정신이 깃들어 고여있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깃대나 상징은 없지만, 그것만으로 거기에 갈 가치는 충분하다. 내린 눈을 쓸어낸 단정한 빗질 자국이 남은 절집 마당은 적막했다. 너무나 고요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소리까지도 느껴질 것 같았다.

대승사는 혹독하기로 이름난 수행의 전통이 이어지는 절집이다. 대웅전 옆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선방 ‘대승선원’이 있다. 선원의 처마 아래 두 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천강사불(天降四佛·하늘에서 사면불이 내려오고)’ ‘지용쌍련(地湧雙蓮·땅에서 쌍련이 솟아났다)’. 현판은 대승사의 오랜 내력을 설명한다.

대승사가 병풍처럼 두른 산이 공덕산이다. 불가에서 ‘좋은 일을 행한 덕’을 뜻하는 그 ‘공덕(功德)’이다. 그 덕의 얘기가 ‘삼국유사’에 나온다. 신라 진평왕 때인 58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에 사방에 부처형상이 새겨진 큰 바위가 하늘에서 비단보자기에 싸여 공덕산 자락에 떨어졌다. 그 얘기를 들은 진평왕이 절집을 세우도록 했는데, 그게 지금의 대승사다. 이야기는 대승사를 지키던 스님이 입적한 뒤에 그의 주검에서 연꽃 한 쌍이 솟아오른 것으로 마무리된다.

네 부처가 새겨진 사불암은 공덕산의 해발 600m쯤에 툭 튀어나온 너럭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다. 대승사 경내에서 산내암자 윤필암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중간쯤에서 산비탈을 숨차게 오르면 나오는 바위 벼랑 끝이다. 사불암이 선 자리는 산 전체를 절집으로 삼은 ‘불단(佛壇)’에 다름 아니다. 높이 3.4m, 너비 2.3m. 모서리가 둥그스름한 바위 네 면에 약사불·아미타불·석가여래·미륵불이 돋을새김돼 있었다는데,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아 부처의 형상은 짐작만 할 뿐이다. 사불암 앞에 서서 부처님이 1400여 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풍경을 훔쳐본다.

대승사에 간 길이라면, 사불암과 함께 암자 윤필암에서 묘적암으로 이어지는 산길 옆 바위에 새겨진 마애석불을 꼭 보고 돌아올 일이다. 마애석불을 새긴 또렷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선(線)도 훌륭하지만, 마애석불로 올라가는 유연하게 굽은 돌계단도 일품이다. 침묵 속에 산중에 홀로 앉은 마애불과 지난 가을의 낙엽이 쌓여있는 고즈넉한 길이 경계와 불안의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선사하는 건 푸근함과 위안이다.

# 넘어진 부처를 세워 돌림병 퇴치하다

문경은 영남 땅에서 소백산맥의 준령을 넘어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옛길의 대표 격인 문경새재, 그러니까 ‘조령(鳥嶺)’은 조선 태종 때 개척한 관도(關道)로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문경에는 새재 말고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 있다. 신라의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개척했다는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고갯길인 ‘하늘재’다. 하늘재는 물리적으로 백두대간을 넘는 고갯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세와 현세를 가르는 관념적 길로 해독되기도 했다. 하늘재 이쪽이 문경의 관음리이고, 고개 너머 저쪽은 충주 미륵리다. 관음(觀音)과 미륵(彌勒).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관음은 현세를, 미륵은 내세를 상징한다.

하늘재 이쪽인 문경 관음리의 사과밭 한가운데 석조반가사유상이 있다. ‘반가’란 왼쪽 무릎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앉아있는 좌선의 앉음새를 뜻하니 반가사유상이란 그런 앉음새로 생각에 빠져있는 불상을 뜻한다. 돌을 깎아 돋을새김한 반가상이 흔치 않은 점도 있지만, 반가상이 눈길을 붙잡는 건 거기 깃든 얘기 때문이다. 반가상의 오른발 부분이 갈라져 돌이 넘어지자 마을에 돌림병이 돌았는데 그걸 다시 일으키니 돌림병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눈길이 가는 건 반가상을 다시 일으켜 세운 주체다. 안내판에는 ‘(넘어진 돌을)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기록해 놓았다. 대승사의 것과 마찬가지로 감염병을 극복하는 연대에 대한 이야기다.

현세와 내세, 이승과 저승을 잇는다는 하늘재 고갯마루 정상에는 지난 연말 수백 년 만에 산신각이 복원됐다. 산신각은 차로 닿을 수 있는 하늘재 정상인 문경 관음리의 옛 성황당 건너편에 있다. 한 칸짜리 목조 건물로 지어진 산신각 안에는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을 중앙에 두고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를 탱화로 그려놓았다. 신라 망국의 상처로 가장 아프게 하늘재를 넘었을,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이제 하늘재 정상에서 액운을 소멸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역할을 맡아 그 길을 가는 이들을 수호하고 있는 것이다.

#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절집과 갤러리

문경의 대승사까지 걸음한 길이라면 지척의 절집 김룡사를 들르지 않을 수 없겠다. 김룡사는 대승사가 지어지고 한 해 뒤인 588년 운달조사가 창건했다. 당초 운봉사라 했으나, 훗날 지극한 정성으로 불심을 잃지 않던 김룡이란 사람의 이름을 따 절집 이름을 김룡사로 고쳐 붙였다고 전한다. 한자로 ‘金龍’이라 쓰니 ‘금룡’이라 읽을 법한데, 김룡사라 부르는 연유다.

김룡사는 한때 마흔여덟이나 되는 말사를 거느렸던 대찰이었지만 지금은 그때 거느린 직지사의 말사로 들어간 처지. 절집의 불전도 대웅전을 빼고는 잇단 화재로 새로 지어진 것이어서 옛맛이 덜한 편이다. 하지만 절집을 감싸고 있는 자연이 빼어나다. 대웅전 뒤편 아늑한 느낌의 금강소나무 숲이나 비구니 암자인 대성암으로 가는 길 양옆으로 늘어선 전나무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전나무 사이사이에서 자라는 떡갈나무며 단풍나무, 느티나무까지 한데 어우러져 그윽한 숲을 이뤘다.

절집 숲의 입구 격인 김룡사로 일주문 주련에 이런 글이 걸려 있다. “이 문에 들어서거든 안다는 것을 버려라(入此門來莫存知解), 비우고 빈 그릇에 큰 도가 가득 차리라(無解空器大道成滿)”. 겨울 숲으로 들어서면서 그 글을 읽고 나니 단단하고, 뾰족했던 마음을 툭 하고 내려놓게 된다.

김룡사를 특별하게 하는 건 성철스님에 대한 기억이다.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 은거하던 성철스님이 산문을 열고 나서 1년 동안 머물며 대중에게 최초의 법문을 하면서 사자후를 토했던 곳이 바로 여기 김룡사였다. 대웅전 마당으로 오르는 석축 왼쪽의 강당인 설선당이 바로 성철스님의 첫 설법장소다.

더불어 문경에서 조용하게 다녀갈 만한 곳이 점촌의 주택에 문을 연 개인 갤러리 ‘소창다명(小窓多明)’이다. 소창다명은 현한근 문경문화원장이 사재를 털어 작고한 선친의 집을 개조해 만든 문화공간이다. 소창다명이란 추사의 글씨에서 가져온 말로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을 뜻한다. 갤러리 1층에는 문경 출신의 화가 임무상 화백의 초대전이 열리고 있고, 2층에는 시조시인 김상옥의 시서화와 애장하던 백자 등을 전시해 두었다. 주택을 개조한 갤러리는 편안하고 따스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오래된 막걸리 양조장을, 커피와 맥주 등을 팔고 전시회도 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단장한 ‘산양정행소’와 맞은 편 200년 된 한옥을 개조한 카페 ‘화수헌’ 등도 추천한다. 거리 두기가 완화된 뒤에 찾아가면 좋을 곳들이다. 늙은 가지가 우산처럼 펼쳐져 감탄사를 터뜨리게 하는 문경 대하리의 반송도 점촌에서 멀지 않다.

■ ‘국보’ 목각상

문경의 대승사에는 나무로 새겨 만든 아미타여래설법상이 있다. 10개의 나무판을 짜 맞춰 아미타여래가 설법하는 정토 세계를 정교하게 표현한 목각이다. 국보로 지정된 이 목각상은 본래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던 것. 대승사가 150여 년 전쯤 큰 법당을 지으면서, 방치되다시피 했던 부석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훗날 부석사가 반환을 요구했지만, 돌려주는 대신 의상대사 영정을 모신 부석사 조사당 수리비용을 대기로 합의했다. 그때의 합의를 기록한 문서도 보물이다.

문경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경북 문경의 절집 김룡사의 대웅전. 1997년 화재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이다. 대웅전 처마에는 나무로 깎은 호랑이며 다람쥐, 꿩, 물고기 등이 숨은그림처럼 조각돼 있다. 하늘재 인근 문경 관음리의 사과밭 사이에 서 있는 석조반가사유상. 반가상이 쓰러지면서 마을에 돌림병이 돌았는데, 반가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 돌림병이 사라졌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문경 대하리의 반송. 거대한 노송의 가지가 구불구불 휘어져 우산처럼 그늘을 드리웠다. 노거수의 자태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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