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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규 논설위원

가을이 무르익으면 풀잎은 빛깔을 바꾸고, 나무는 이파리를 벗는다 했던가.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이 저물어가는 가을임을 실감케 한다. 서울 도심은 아직 멀었지만, 단풍 관광지에는 단풍객들의 비대면 눈길이 바쁘다. 소설가 정비석은 산들바람에도 우수수 잎 지는 서글픈 소리에 가을을 애달픈 계절이라 했고, 수필가 김태길은 늦은 봄에 피었다가 가을이 저물기도 전에 잎을 떨구는 은행나무의 대인지풍(大人之風) 그 초연함이 장하다 했다. 이렇듯 해마다 이맘때는 따스했던 봄날과 화려했던 여름날의 노고를 수확하는 시간이다.

그렇다고 산과 들의 초목에만 가을빛이 담기는 건 아니다. 한자 가을 추(秋)에도 황금빛 결실의 흔적이 녹아 있다. ‘秋’의 과거형은 벼 화(禾)와 불 화(火)의 자리가 서로 바뀐 글자였다. 그보다 더 옛날에는 오늘의 한자와 전혀 다르게 메뚜기를 글자로 형상화한 그림문자였다고 한다. 그런 변형 과정을 거쳐 오늘에는 곡식(禾)이 햇볕(火)에 익어 가는 계절, 곧 가을을 뜻하는 ‘秋’가 됐다. 흔히 시문에서는 봄과 가을이 대구를 이뤄 의미를 만들고 생각을 담아낸다. 춘추(春秋)라는 말이 그렇다. 봄과 가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지만, 해(年·년)나 나이(歲·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5경의 하나인 ‘춘추’에서 유래하여 역사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춘추필법’이란 말이 파생됐다. ‘춘추’처럼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나 감정에 쏠리지 않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기술하는 저술법이다. 언론으로 치면 정론직필(正論直筆) 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청와대의 춘풍추상(春風秋霜) 얘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글자 그대로만 새기면, 봄바람과 가을 서리라는 뜻일 뿐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영어 문장처럼 생략된 어휘를 되살려야 뜻을 제대로 알아챌 수 있다. 춘풍과 추상 앞에 각각 대인(待人)과 지기(持己)를 덧붙여야 완전한 문장이 된다. 남을 대할 땐 봄바람같이, 자신을 지탱할 땐 가을 서리처럼 차갑게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권력자들은 이를 ‘대인춘풍 지기추상’이라 읽으면서 ‘대인추상 지기춘풍’으로 의미를 새기는 듯하다. 내 편에겐 따뜻하게, 남들에겐 차가운 서릿발같이! ‘검찰개혁’을 내건 법무장관의 권력 남용을 놓고 보면 더 이해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