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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일기자의 여행]

아홉계곡 굽이굽이 초록에 물들다

박경일 기자 | 2020-05-08 10:08

충북 괴산의 화양구곡 아홉 곳 명소 중에서 요즘은 반석과 한옥 암서재가 어우러지는 4곡 금사담 일대를 최고로 치지만, 옛사람들은 마지막 9곡인 파천(巴串) 일대를 최고의 경치로 꼽았다. 파천은 너럭바위가 넓게 펼쳐진 계곡에 커튼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이 운치가 넘치는 곳이다. 충북 괴산의 화양구곡 아홉 곳 명소 중에서 요즘은 반석과 한옥 암서재가 어우러지는 4곡 금사담 일대를 최고로 치지만, 옛사람들은 마지막 9곡인 파천(巴串) 일대를 최고의 경치로 꼽았다. 파천은 너럭바위가 넓게 펼쳐진 계곡에 커튼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이 운치가 넘치는 곳이다.


■ 괴산의 ‘수채화 같은 화양구곡’

300년 세월에도 절벽·푸른 沼 품은 화양구곡 옛 모습 그대로
마지막 9곡 오르막 ‘거북 바위’가 파천 가는 숲길 안내
흰 바위 사이로 물이 커튼처럼 흘러… 건너편 숲은 연둣빛 파도

3㎞ 오솔길 걷다 보면 괴산호에 찍힌 초록숲 데칼코마니 오묘
수령 1000년 공림사 느티나무… 촛농 흘러내린 형상 압권
적요한 사찰 각연사엔 붉은 입술 품은 ‘비로자나불’ 웅장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괴산에 살았던 한 선비가 남기고 간
시(詩)가 있습니다.
문자로 그려낸 풍경이 마치
붓으로 그린 그림과도 같습니다.
“옛 절은 적막하나
층층마다 산을 대하고 있고
숲 사이 물길 안개 속에 있는데
낮이 고요하니 이끼낀 문 닫혔어라
…(중략)…
선 탑에 해지도록 세상 일 생각하니
산 빛은 푸르러 옷을 적시려 하네.”
아마도 그가 붓을 들었던 때가
신록이 녹음으로 넘어가던
이즈음의 계절이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지금 괴산에 가서 만나는 풍경도
이와 다를 게 없으니 말입니다.


# 괴산에 구곡(九曲)이 많은 이유

충북 괴산에는 도처에 ‘구곡’이 있다. 이름나기로는 화양구곡이 으뜸이지만, 못지않은 선유구곡도 있고, 쌍곡구곡, 갈은구곡, 연하구곡, 풍계구곡에다가 괴강 줄기를 따라 이름 붙여진 고산구곡도 있다. 조선 시대에 정한 구곡으로 이름 붙여진, 맑은 물 흐르는 수려한 괴산의 계곡이 7개나 있는 셈이다. 특이한 것은 구곡을 정하고 경영하는 전통이, 괴산에서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 2009년에는 군자구곡이, 2010년에는 풍천구곡이 만들어졌고, 최근에는 지역주민들이 합의해 감물면 달천 상류에다 유창구곡을 정하기도 했다. 이 많은 괴산의 구곡 중에서 맨 앞에 놓아 마땅한 곳은 화양구곡이다. 괴산이 아니라 나라 안을 통틀어서도 화양구곡은 구곡의 중심이다. 경관도 경관이지만, 그보다 화양구곡에는 구곡의 의미, 그리고 한계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구곡의 시작은 중국 남송 때의 학자 주희(주자)다. 주희는 자신이 머물던 무이산 아홉 계곡을 ‘무이구곡’이라 이름 붙이고 이를 기리는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지었다. 구곡의 빼어난 경치를 읊으면서 주희는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상징과 은유로 자신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드러냈다. 구곡은 중국이 아니라 조선에서 더 번성했다. 주희의 주자학을 흠모하던 조선의 선비들에게 구곡은 그야말로 ‘미적·학문적 유토피아’로 받아들여졌다.

구곡의 대표로 화양구곡을 꼽는 건 거기 송시열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효종이 죽자 정쟁에서 권력을 잃고 여기 화양계곡으로 낙향한 송시열은 이곳에 칩거하면서도 망한 명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놓지 않았다. 화양동의 본래 지명은 상록관목인 황양목(회양목)이 많다고 해서 ‘황양리’였는데 송시열이 내려와 ‘화양(華陽)’으로 고쳐 지었다. ‘화(華)’는 중화의 의미로서 명나라를 지칭하는 것이고 ‘양(陽)’은 ‘일양내복(一陽來復·불행이 지나고 행운이 찾아온다)’의 의미다. ‘망한 명나라가 화려하게 부활할 것’이란 기대를 지명에 담은 것이다.

송시열의 명에 대한 사대의 정점은 여든두 살의 나이에 길 위에서 사약을 받고 죽기 직전 제자에게 화양동에다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지으라고 명한 것이었다. 제자는 스승의 유언대로 화양계곡에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을 모신 사당 만동묘를 지었다. 그리고 주자학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송시열을 기리는 마음으로 제자들이 화양동 계곡에다 화양구곡을 정했던 것이다.

송시열을 흠모하던 기호 사림들에게 구곡을 정한다는 건 그의 학문적 전통과 뜻을 잇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만동묘를 탐방하기 위해 화양동을 찾았던 화양구곡에서 선비들은 어떻게 구곡의 자리를 정하고, 거기에 의미를 담을 것인지를 배웠다. 유독 산이 깊고 물이 많은 괴산에 구곡이 여럿 만들어진 연유가 이렇다.


# 구름과 청학… 300년 전의 이름

너럭바위와 절벽, 그리고 푸른 소(沼)로 이어진 화양계곡의 구곡, 그러니까 아홉 군데 명소는 흐려진 곳 하나 없이 뚜렷하다.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운 물가’란 뜻의 운영담(雲影潭)이며 청학이 바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는 학소대(鶴巢臺), 큰 바위가 첩첩이 쌓여 그 위에서 별을 볼 수 있다는 첨성대(瞻星臺)…. 물줄기와 지형이 바뀌고도 남을 300여 년의 시간에도, 거의 완벽하게 본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하나하나 이름에 새긴 뜻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연경관은 옛 선비들이 유유자적 풍류를 즐기던 시절과 다를 게 별로 없는 듯한데, 문제는 계곡까지 거침없이 밀고 들어간 커피숍이며 식당이다. 계곡의 구곡을 따라가는 길에다 깔아놓은 시멘트 보도블록도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탐방객들의 차량은 통제하면서 계곡 옆 식당과 커피숍 손님들은 차로 마음껏 드나들도록 하는 바람에 번잡스럽기 짝이 없다. 옛 선비들의 풍류가 깃든 고즈넉한 명승이자 속리산국립공원의 명소가 대중 유원지나 휴게소, 좀 심하게 말하자면 ‘무심한 소풍객들의 낮잠 터’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화양구곡 중에서 가장 풍류 넘치는 공간이라는 제4곡 금사담(金沙潭)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금사담이란 물속의 모래가 금싸라기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모래보다는 송시열이 정계 은퇴 후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단아한 암서재 건물이 너른 반석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탄성을 자아낸다. 그런데 암서재 맞은편을 카페며 식당이 다 차지했고, 그 앞은 손님들이 몰고 온 차들로 주차장이 돼버렸다. 번잡함에 등을 돌리고 앉아도 야외 카페에서 틀어놓은 팝송과 대중가요가 영 거슬린다. 수년 전에 쇠락하고 오래된 식당 건물 몇 채가 고작이었을 때만 해도 덜했는데 정비를 마친 뒤에 말끔한 식당과 카페가 들어서고 합법적 영업을 하게 되면서 경관은 완전히 흐트러졌다. 계곡과 길 위에 있는 것들을 이제 좀 덜어내거나 지워야 할 것 같은 데 웬걸, 괴산군은 계곡 물길 옆으로 덱 공사를 새로 시작하며 오히려 ‘더 보태는’ 중이다. 오죽했으면 속리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직원마저 ‘괴산군에서 돈이 남아돌아서 하는 일’이라며 혀를 찼을까.


# 화양구곡 중 으뜸은 아홉 번째 굽이

화양구곡의 최고 경관은 마지막 9곡 파천(巴串)에 있다. 송시열이 죽은 지 50여 년 뒤에 발간된 지리책 ‘화양지(華陽誌)’는 파천을 ‘화양계곡에서 첫째가는 절경’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9곡까지 가는 이들은 많지 않다. 1곡부터 7곡까지는 금방인데, 8곡과 9곡은 상대적으로 간격이 먼 데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기 때문이다. 9곡까지 가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붙여놓은 사진 때문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보는 파천은 뭐 별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파천 얘기를 하려면 9곡까지 가는 길에서 만나는 거북바위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8곡에서 9곡까지는 오르막이다. 길은 계곡과 멀어지면서 높아진다. 높아진 숲길을 걷다 보면 비탈면 쪽 솔숲 사이에 무더기를 이룬 바위가 있다. 형상이 영락없는 거북이 모양의 바위다. 옛사람들이 흔히 거북바위라거나 귀암(龜巖)으로 부르는 바위는 대부분 ‘그렇다고 하니 그래 보이는’ 정도지만, 여기 거북바위는 세밀화에 가깝다. 머리와 뒷발까지 영락없이 계곡으로 내려가려는 거북이다.

거북바위를 지나면 9곡 파천으로 내려가는 숲길이 나온다. 계곡에 내려서면 희고 깨끗한 너른 바위가 드넓게 펼쳐지고 물줄기가 그 위를 커튼처럼 흘러내린다. 어디가 파천이냐고 물을 것도 없다. 펼쳐진 너른 계곡 전체가 파천이다. 물도 좋고 바위도 좋다. 이즈음 신록으로 물든 물 건너편의 숲은 마치 거대한 연두색 파도가 일어선 것 같다. 싱그러운 신록을 마주하고 너럭바위에 앉아서 물에 발을 담그면 마치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계곡 이쪽에는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있고, 그 아래에 비가 온대도 한 방울 맞지 않을 아늑한 자리가 있다. 어떻게 글로 설명할 방도는 없는데, 가서 보면 ‘아, 여기구나’라고 금세 알 수 있다. 숲이 신록에서 녹음으로 짙어가는 요즘 같은 때에 그 자리에 앉아 소나기 내리는 계곡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수채화 물감처럼 숲의 연두색이 촉촉하게 적셔지는 모습을 빗소리와 그리고 비가 그친 뒤의 뻐꾸기 울음소리와 함께 보는 기분은 어떨까.


# 산막이옛길보다 더 나은 오솔길

괴산의 명소로 이즈음 화양구곡만큼 알려진 곳이 바로 괴산호를 끼고 있는 ‘산막이옛길’이다. 산막이옛길은 괴산호로 앞이 막히고, 군자산이 뒤를 막은 오지 중의 오지 ‘산막이 마을’로 들어가는 산 허리춤의 벼랑길을 다듬어 만든 걷기 길이다. 애초에 관광객 유치를 위한 ‘걷기 명소’를 겨냥해 만들었으니 길을 놓을 때부터 출렁다리와 전망대, 오두막 등 걷기의 지루함을 잊을 만한 재미를 끼워 넣었고, 간 길을 고스란히 짚어 걸어 되돌아 나와야 하는 코스의 단점 극복을 위해 길 끝에서 배를 타고 나올 수 있도록 괴산호 유람선을 운영했다. 결과는 대히트였다. 지금은 연간 방문객이 100만 명에 좀 못 미치지만, 산막이길 인기가 절정이던 2016년에는 한 해 152만 명의 관광객이 이 길을 걸었다.

처음 산막이옛길을 냈을 때만 해도 자연스러운 길의 느낌을 지키면서 딱 거슬리지 않을 만큼만 손을 댔는데, 관광객이 늘면서 길은 반들반들한 유원지처럼 다듬어졌다. 딱 3가구가 살던 고즈넉한 산막이 마을도, 곳곳에 식당이 들어서 북적거리는 동네가 됐다. 가볍게 찾아가는 가족 단위 행락지로는 더 편리해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고즈넉한 풍경을 가로질러 걷기를 즐기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번잡스럽다.

괴산에는 산막이옛길만 있는 건 아니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더 나은 길이 여럿 있다. 더 고즈넉하고 인적도 없을뿐더러 풍경도 훨씬 더 좋은 길이다. 그중 첫손으로 꼽을 만한 길이 청천면 운교리에서 칠성면 갈론마을까지 이어지는 3㎞ 남짓의 수변 오솔길이다. 이 길은 산막이옛길과 마찬가지로 괴산호를 끼고 이어지는데, 산막이옛길이 괴산호 하류의 서쪽 호안을 따라 이어진다면, 이 오솔길은 반대 상류의 동쪽 호안을 끼고 간다. 오솔길은 ‘속리산 둘레길’ 구간에 속하기도 하고 ‘충청도 양반길’과도 겹쳐진다.

오솔길의 출발지점은 청천면 운교리다. 길 찾기는 쉽다. 운교리마을회관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한창 신록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버드나무 무성한 습지로 내려가면 물 건너편으로 바위벼랑인 신랑바위(사모바위)가 나타난다. 신랑바위를 마주 보고 각시바위(선유대)가 있는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이미 오솔길에 접어든 것이다. 호수에 벼랑으로 솟은 각시바위는 괴산의 또 다른 구곡인 ‘연하구곡’의 제1곡인 탑암으로도 불린다. 길은 각시바위를 지나 갈론마을까지 이어지는데, 출렁다리가 있는 연하협까지만 가서 되돌아오는 게 낫겠다. 오솔길은 고요하다. 간혹 낚시꾼들이 탄 배가 숲의 초록이 데칼코마니처럼 찍히는 수면 위를 고요하게 오갈 뿐이다.

# 느티나무 노거수와 정갈한 절집

괴산은 한자로 ‘회화나무 혹은 느티나무 괴(槐)’에 ‘뫼 산(山)’을 쓴다. 괴산에는 실제로도 늙은 회화나무며 느티나무가 많긴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부터 회화나무 괴(槐)자는 ‘으뜸’이라는 뜻으로도 읽었다.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를 ‘괴부(槐部)’라고 했고, 왕궁을 ‘괴신(槐晨)’으로, 승정원을 ‘괴원(槐院)’으로 불렀던 이유다. 괴산의 ‘괴(槐)’자는 또 한편으로는 불탑의 의미도 깃들어 있다.

지명이 상징하는 것처럼 괴산 땅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비롯한 노거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탑이 상징하는 사찰이나 불교유적도 곳곳에 있다. 먼저 느티나무 얘기부터. 괴산의 마을은 어디나 수령 몇백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거수 한 그루쯤을 거느리고 있다. 그중 압권이 장연면 오가리 우령마을에 있다. 우령마을의 느티나무 세 그루는 더할 수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신목(神木)의 자세를 갖추고 있다. 수령 800년이 넘는 느티나무에서는 다른 나무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특유의 권위와 위엄이 느껴진다.

세 그루의 느티나무 중 가장 아래 있는 것이 형님뻘로 천연기념물이다. 이 나무 북쪽의 비탈에 뿌리내린 느티나무 거목은 나이는 좀 빠지지만, 활개를 치듯 펼친 가지의 크기와 위용은 더 대단하다. 이 두 나무와 조금 떨어진 둔덕에 서 있는 느티나무까지 합쳐 세 그루의 거목이 서 있는 곳을 마을 사람들은 ‘삼괴정’이라고 부른다. ‘세 그루 괴목(느티나무) 정자’란 뜻이다. 비록 정자는 세워진 적이 없지만, 세 그루 느티나무가 정자 역할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천면 사담리의 낙영산 아래 아늑한 사찰인 공림사에도 우람하게 가지를 뒤튼 느티나무 노거수 20여 그루가 서 있다. 이중 종무소 옆에서 자라는 느티나무가 가장 나이가 많다. 수령 1000년을 훌쩍 넘겼다는데, 촛농이 흘러내린 것 같은 형상의 나무 밑동 크기에 입이 딱 벌어진다.

괴산의 절집 중에서 각연사를 빼놓을 수는 없다. 각연사는 1500여 년 전 신라 법흥왕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절집이다. 법주사보다 창건이 30년쯤 앞서지만, 절집의 위세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보잘것없다. 고작 대여섯 개의 전각만 헐겁게 앉아있을 따름이다. 대신 각연사를 가득 채우는 건 맑음과 정갈함이다. 언제 가도 각연사는 고즈넉하다. 적요한 사찰 마당에는 늘 정갈한 빗질 자국이 남아있다. 각연사 비로전에는 화강석을 쪼아 만든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유독 입술이 붉은 비로자나불은 괴산이 가진 두 개의 보물 중 하나다. 불상과 함께 눈여겨봐야 할 것이 비로전 앞마당의 350년 수령의 아름드리 보리수나무다. 보리수는 불가에서 깨달음의 나무로 불린다. 일상의 소중함을 조금씩 찾아가는 사이에, 마치 깨달음처럼 각연사 보리수나무에는 지금 연초록 새잎이 돋고 있다.


■ 괴산과 신선

예부터 산 첩첩한 괴산의 빼어난 계곡에는 기도와 수련으로 신선이 되기 위한 이들이 몰려들었다. 지명에 유독 ‘신선 선(仙)’자가 많은 건 그래서다. 선유구곡이란 이름도 그렇고, 망선대와 은선암도 그렇다. 운교리 각시바위의 다른 이름도 선유대다.

괴산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청천면 운교리 앞의 괴산호 상류에서 이른 아침 낚시꾼이 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고 있다. 신록이 물든 숲의 연두색이 고요한 수면에 거울처럼 비췄다. 운교리에서 갈론마을까지 이런 풍경을 끼고 걷는 매혹적인 오솔길이 있다. 화양구곡의 마지막 9곡 파천 가는 길가에 있는 거북바위. 바위가 어우러져 이룬 거북의 형상이 일부러 만든 듯 또렷하다. 괴산에는 노거수가 유독 많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장연면 오가리의 세 그루 느티나무 노거수 중 하나. 수령 800년을 헤아린다. 괴산 연풍에서 수안보 쪽으로 이어지는 길가에 쌍둥이 마애불(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이 있다. 바위에는 나란히 앉은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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